[해준백기] 심해 # 未生 2015. 1. 30. 21:54

深海

해준백기




1.


예보에서 날씨가 풀렸다더니 여즉 바람이 차다. 백기는 길어지는 기다림에 휴대폰을 꺼냈다. 와 있는 연락은 없다. 의미 없이 화면을 눌러대다 달력을 열었다. 내일은 수학 과외가 있고……. 그때 긴 그림자가 백기를 덮었다. 백기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제법 커다란 키에 마른 체형을 가진 남자는 벤치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기는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한눈에 봐도 질 좋아 보이는 브리프 케이스를 한쪽 손에 든, 앳되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니 못해도 20대 후반. 자신이 밝히지 않아서인지 채팅할 적에도 그는 나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남자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별다른 말이 오가는 것은 아니어도 첫 만남의 긴장은 숨길 수 없다. 백기는 그의 머리 꼭대기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 훑고서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알아본 남자가 고갯짓을 했다.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건지 모르겠다.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백기는 생각했다. 일단 오라고 해서 온 거였지만은, 이 근방에는 모텔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은 그가 이끄는 대로 어미 뒤꽁무니를 쫓는 오리 새끼처럼 졸졸 따를 뿐이다. 남자는 긴 다리만큼이나 보폭이 넓었다. 차오르는 숨을 내뱉으며 따라잡으면 갑자기 몸을 돌려 진로를 바꿨다. 경적을 울리며 달리던 자동차 소리도 삼삼오오 모여 하교하는 아이들 소리도 언젠가부터는 들리지 않는다. 어딜 가는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아파트 단지 입구가 커다랗게 보인다. 뭐야, 집으로 가는 거였어? 



“집으로 가실 거면 주소 알려주시죠. 알아서 찾아갈 수 있는데요.”

“여긴 입주민이랑 동행하지 않으면 혼자서 못 들어와.”



능숙하게 카드키를 조작한 해준은 백기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무게가 실림과 동시에 그것은 소음 없이 단숨에 올랐다. 정확히 정해진 차례를 지키는 듯하면서도 서두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해준의 집은 상층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었다. 다 왔어. 

어둔 집안에 들어선 백기는 곧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사는 집 치고 지나치게 큰 게 아닌가 싶은 널찍한 내부, 그리고 양말 아래로 느껴지는 매끄러운 바닥, 모델하우스 같은 인테리어. 해준이 샤워를 하는 동안 백기는 거실에 앉아 연신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심심하면 TV를 켜서 봐도 된다고 했지만 흥미가 있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한 쪽 벽을 통째로 채운 책장과 빼곡히 꽂혀있는 소설책들. 유리장 안의 비행기 모형이라든지 그 아래의 게임시디들 같은 것들. 의외였다. 이런 삭막하리만치 단정한 곳에 사는 사람 치고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기에, 채찍이 들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물소리가 멎고 백기는 교복 재킷과 셔츠, 바지를 차례로 벗었다. 샤워를 마치고 맨몸으로 나오던 해준은 되려 알몸이 된 백기를 보고 움찔했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해준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구르는 백기의 옷가지들을 주웠다. 어째 낯익은 교복이다 했더니 가슴 부근에 달린 마크에 ◇◇외고라고 쓰여 있다. 재밌고. 



“공부하면서 스트레스 받나봐?”



해준은 빳빳한 천에 단정하게 자수된 이름을 더듬었다. 장백기……. 백기는 대답하지 않고서 너른 침대에 폴짝 올라가 누웠다. 해준이 재킷을 잘 보이게 들어 올리고는 마크를 가리켰다. 뭔데, 이거. 



“저 긴 말 하고 싶지 않아서 아저씨 만나는 건데.”



그냥 하죠. 백기는 걸치고 있던 속옷마저 벗어냈다. 해준은 바람 빠진 웃음을 내더니 어깨를 으쓱 한 번 하고서 옷걸이에 그의 옷들을 걸었다.  해준의 입술이 백기의 입술과 포개졌다. 잠깐. “근데 누가 아저씨야.” 백기는 입 꼬리를 올려 웃고서는 해준을 뒤집어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두 번째 키스는 백기의 주도 하에 길게 이어졌다.     



해준은 매너가 좋고, 깔끔했다. 깔끔에는 두 의미 모두가 적용됐다. 백기는 사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둘 다 가졌다. 관계 후 해준은 서랍을 뒤져 명함을 꺼냈다. 이게 뭐예요? 백기는 안경을 쓰지 않아 흐릿한 눈을 명함 가까이에 가져다 대고 글자를 읽었다. 원 인터네셔널. 삼척동자도 아는 대기업이다. 철강 1팀 사원 강해준. 앞으로 연락은 그쪽으로 하면 돼. 뜻밖의 제안에 백기는 눈썹을 일자로 눕혀 세웠다. 해준은 관계를 지속하길 원했고 백기로서는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줄어들 것이고 성가신 중간 과정을 생략할 수도 있었다. 물론 좋은 아파트의 고급 가구 위에서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도 포함.        



“앞으로는 이쪽으로 곧장 오면 되죠? 아까 거기 사람들 많이 지나다녀서.”

“좋을 대로.”



백기는 침대에서 내려와 가방을 뒤져 얇은 참고서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해준의 명함을 꽂아 넣었다.   






2.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흐, 읏, 뭐, 뭔데요? 아윽, 거긴, 윽.”

“너는 왜 모르는 사람 하고만 해?”

“…….”

“응?”

“읍, 왜요,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요, 흐으.”

“연애가 싫은 거야, 몸만 달은 거야?”

“…….”

“…….”

“…둘 다요.”



둘 다요.  






3.


일대에서 장백기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그의 이름 석자는 유명했다. 일차적으로는 학생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외모로 당선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을 만큼 잘생긴 외모 -교지에 실릴 사진 촬영에도 몇 번 나간 이력이 있다- 에 리더십 또한 출중했다. 백기는 자신의 타이틀을 꽤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길 원했다. 강박과도 같았다. 제 성향이 알려지고 그것이 불러올 파장에 대한. 백기는 일찍이 자신의 남다른 성향을 자각했다. 하지만 미성년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드물었다. 바에 가는 것이나 클럽에서 남자를 만나는 것들 등을 포함해서. 시내에 암암리에 알려져있는 카페 같은 곳이 있다고도 하였지만 백기는 자신이 게이라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것도 방법이 되지는 못했다. 정상적인 루트로 교제하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고백을 하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결국 백기는 다소 무모한 선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도 의식적으로 또래는 피했다. 간단했다. 만나서, 관계하고, 헤어진다. 외박은 불가능해서 끝나면 나왔다. 마음에 드는 상대는 몇번 더 만나기도 했다. 해준도 여러 번 물은 것이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한 요구는 먼저 거절할 수 있었다. 물론 제 쪽에서 궁금해 승낙한 적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  






4.


언덕길을 내려오던 백기는 교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옆에서 걷던 상현이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백기가 나직히 말했다. 오늘은 나 먼저 갈게.



“왜 여기까지 찾아와요. 저 이런 거 싫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전화 안 받더라. 답장도 안 하고.”

“전화는 학교 오면 끄고요, …어플은 지웠어요. 카톡도.”

“문자도 몇 개 남겨놓은 걸로 기억하는데.”



해준을 데리고 백기가 온 곳은 학교에서도 한참 떨어진 공원이었다. 애초의 계획은 교문 앞에서 에둘러 보내는 것이었지만, 해준은 꿈적도 하지 않았기에 지나가는 아이들의 호기심만 샀을 뿐이었다. 백기는 처음으로 치기 어린 자신의 일탈을 후회했다. 안경 아래로 손을 넣어 건조한 눈을 비볐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가로등 아래의 해준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칠 만큼 멋져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조차 힘이 들었다.



“되게 의외네요. 저는 형이 쿨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만났던 거고요. 백기는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을 꾹 참았다. 



“왜, 이제 또래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 아저씨는 나이 들어서 별로야?” 

“아저씨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그런 거 아니니까 앞으로 학교에 찾아오는 건 지양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백기는 가볍게 목인사를 하더니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백기야.”



돌아선 채로 백기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좋아해.”



쿵 그의 심장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백기는 그대로 후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시큰거리며 뜨거워졌다. 



“백기야. 연락해. 기다릴게.”

“……저 가봐야 돼요.”



갈라진 목소리가 멋대로 튀어져 나왔다. 뚜벅뚜벅 백기의 등은 해준에게서 멀어졌다. 백기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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