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반려 4 # 未生 2015. 1. 11. 19:01

4.


문을 열자마자 몸이 빙글 돌더니 신발장에 등이 닿아 왔다. 사고회로가 채 돌기도 전에 양 손목을 잡힌 백기는 급히 가까워지는 해준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기대를 충족시키듯 백기의 입술 사이로 말랑한 것이 비집고 들어왔다. 백기는 감은 눈을 크게 떴다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그의 얼굴에 다시 눈을 감았다. 혀를 얽는 것만으로도 단전께에 힘이 들어가는 이 기분은 소름이 돋을 만치 익숙한 것이었다. 결코 강압적이지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입맞춤은 짧게 끝날 것처럼 강하게 숨을 조여오다가도 여유 있게 입술을 물고 늘이기도 했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로 현관에 잡혀 모자란 숨을 잇새로 헐떡이던 백기는 밀려오는 자극에 어쩔 줄 몰라 다리만 배배 꼬았다.   



“잠깐, 잠깐만요.”



달아오르기 직전 백기는 가까스로 그를 떼어낼 수 있었다. 이대로 저를 놓고 그에게 온전히 맡겨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기도 그렇지만, 마주한 해준이 자신과는 다르게 놀랍게도 평소와 같은 포커페이스라 이대로라면 억울함 마저 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진짜 저녁 대접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흐려지는 말꼬리처럼 잡힌 손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백기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와 냉장고를 열었다. 아, 믿을 수 없게도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장을 봤더라. 지난주에는 본가에, 두 주 전에는 주말 내내 약속이 있었다. 백기는 냉장고에 팔을 뻗은 채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텅텅 빈 내부처럼 머리도 새하얗게 비워져가는 것 같았다. 밥솥과 찬장도 마찬가지로 먹을만해 보이는 게… 없다. 냄비에 아침에 먹다 남은 찌개가 있었지만 이걸 먹자고 해준 앞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백기는 냉장고에 붙어있던 전단지 두 개를 떼어냈다. 



“저기 대리님. 족발, 보쌈 어떤 게 좋으십니까?” 

“나는 장백기 씨가 직접 요리해오는 줄 알았는데요.”

“그게… 장 보는 걸 깜박해서.”



아무것도 없네요. 백기는 뻘쭘함에 괜히 크게 웃어 보였다. 결국 보쌈으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앉아 배달을 기다렸다. 게다가 지갑을 찾는 동안 해준이 나서 계산까지 마치는 탓에 백기는 먹는 내내 합죽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대리님을 오시라고 해서……. 그럼 다음번엔 정식으로 초대해줘요.  




**




백기의 옆자리는 외근으로 오후 내 비어있었다. ‘늦을 겁니다. 먼저 퇴근하세요.’ 백기는 책상에 꼭 맞게 들어가 있는 빈 의자를 보다 휴대폰을 들어 주말 내내 들여다보았던 사진 귀퉁이를 의미 없이 쿡쿡 찔렀다. 그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참으로 강해준 대리다웠다. 외국 거리의 배경에 재미없이 서 있는 전신. 확대를 해도 역광 탓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디서 찍은 건지 힌트를 찾으려 구석구석을 확대해 봐도 백기로선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언제 다녀온 걸까.  



퇴근 전에는 돌아올 거라던 해준은 6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백기는 속속들이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로에 선 채 고민했다. 메시지를 보내 볼까. [언제 오세요] 언제 오냐고 물으면 해준은 되려 ‘왜’냐고 되물을지도 몰랐다. 왜냐고, 왜냐면… 같이 퇴근하고 싶어서요. 그러면 먼저 퇴근하라고 하겠지. [끝나셨습니까] 이거라면 대답은 네 혹은 아니요. ‘그런데 왜요?’ 어떻게 보내어도 도출되는 결과는 뻔할 뻔 자였다. 분명한 목적이 없다면 반복될.     


기다릴까. 어쨌든 오늘 안에는 올 터이니 잔업이라도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고 함께 퇴근하는 것까지 가능할 것 같았다. 백기는 모니터 아래의 시계를 보았다. 7시. 저녁은 먹어두는 게 좋을 지도.



「퇴근했습니까」



나가려는 찰나에 휴대폰이 울렸다. 백기는 상단에 적힌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타이밍 좋게 보내오는 문자들은, 혹시 넥타이 같은 곳에 카메라를 붙여두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아직 회사입니다」

「오늘 못 올라갑니다 기다리지 마요」



백기는 두 문장으로 끝나는 문자에 맥이 빠졌다. 자신을 기다릴 걸 알고서 부러 먼저 연락을 한 것일 테지만 그런 배려보다는 당장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백기를 서운하게 했다. 네. 백기는 짧은 대답을 보내고 의자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정말로 다음 날 점심을 훌쩍 지난 때에 분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인 씨, 포항 쪽에 보낼 규격 정리한 리스트 지금 보내줘요.”

“네. 알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는 생략한 채 해준은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통화했다. 바쁜 사수의 옆모습을 보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지만 백기로선 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해준이 통화를 하며 메모를 하는 듯싶더니 파일 더미를 그대로 백기에게 넘겼다. 백기는 얼떨결에 받아 들고도 영문을 몰라 멍청히 그것을 보았다. 해준이 넘겨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백기가 파일을 열자 그곳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회의를 할 예정이니 회의실을 예약하라는 지시를 포함한 오늘 할 일이 죽 적혀있다. 그럼 그렇지, 뭘 바란 거냐. 



주말에 해준을 그렇게 보낸 것에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한 번 밀어낸 건 맞았으니까. 현관 앞의 격렬했던 키스 후로 다른 것은 더 없었지만 해준이 그릇을 비우고 늦었다며 자신의 집을 나설 때까지 내내 졸아 붙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백기 씨.”


“장백기 씨.”

“네? 넵.”



잡념에 잠겨있던 백기는 뒤늦게 해준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해준은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십 분 뒤에 회의할 거니까 세 부 복사해서 2회의실로 가지고 와요. 지금.”



그리고 얇은 종이 몇 장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백기는 휴게실에 들어오며 머리를 흔들었다.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는다는 건 백 퍼센트 농담만은 아니었다. 주변에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로. 복사기에서 종이가 뽑혀 나오는 중에 해준이 따라 들어왔다. 백기는 요란한 복사기 소리가 멎을 때쯤 해준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 해준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백기를 보고 있었다.



“대리님.”

“집중 못 할 거야?”



꾸짖는 목소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나긋했다. 죄송합니다…. 백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준은 백기의 턱을 가볍게 잡아 눈을 보게 하더니 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요?” 네. 턱이 잡힌 채로 백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해준이 입꼬리를 한 번 올리고는 말했다. 



“이따 봅시다.” 



그리고는 출력물을 쓸어 담고서 휴게실을 나섰다. 이따 봅시다. 회의를 뜻하는 건지 저녁을 뜻하는 건지 백기가 생각하고 있을 때 해준이 앞서 가며 말했다.   



“회의실로 곧장 와요.” 




**




백기는 로비에서 달달 떨며 해준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금방 갈 테니 먼저 내려가라고 했을 때 그냥 같이 내려가겠다고 할 걸 후회했다. 여기에 계속 서 있으면 온 회사 사람을 다 만날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를 기다리냐는 말에 다섯 번쯤 대답했을 때 해준이 내려왔다. 



“선지 못 먹으면 곱창이나 육회 같은 것도 못 먹겠네요?”

“어…….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 물컹한 식감이….”

“그럼 피가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도?”

“네. 그것도 좀…….”



마치 음식을 가리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백기는 부끄러워졌다. 결국 두 사람이 가게 된 곳은 회사 근처의 평범한 고깃집이었다. 건너 테이블에는 아는 얼굴들도 몇몇 있었다. 팀의 선후배 사이인 둘이 단둘이서 저녁 식사를 하러 왔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해준은 고기 2인분과 소주 그리고 백기 몫의 맥주를 시켰다. 그가 백기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요. 



“일하는 데 힘든 건 없습니까.”

“힘든 건… 없구요. 그냥… 제가 맞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리님 저는, 정말 이게 맞는지, 맞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닿지 않는 물음이 입가를 맴돌았다.



“백기 씨는 잘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하면 됩니다.”



백기 씨가 틀린 길로 가고 있으면 저 혹은, 제가 아닌 누군가라도 틀렸다고 얘기해 줄 겁니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은 백기 씨가 잘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백기는 문득 더 묻고 싶은 게 생각났지만 이내 집게를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해준을 보았다.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게 좋을까요?”



백기는 어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에는 큰 생각이 없었다. 그냥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일을 잘해서 인정을 받으면 물질이든 명예든 당연하게 따라오게 된다고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얻는다. 해준도 같은 생각일까. 강해준은 실제로 회사 내에서도 인센티브를 가장 많이 받는 유능한 직원이었고 그런 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지 그는 늘 궁금했다. 

 


“목적이나 성취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그게 달성되거나 사라졌을 때 상실감으로 돌아옵니다.”

“목표가 없다면… 앞으로 뭘 해야할 지 모르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백기 씨가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세요. 주어진 것을 하다 보면 다음 것이 보이고, 백기 씨가 이 정도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면 회사에서 백기 씨에게 새로운 걸 제시하게 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백기는 알 듯 말 듯한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해준은 웃으며 백기의 잔을 채워 주었다. 




**




“선이요?”


엄마 저 아직 스물일곱이에요. 아뇨, 있는 건 아니구요. 아니 그러니까 왜, 선은 좀. 그거랑은 상관없다니까요. 제가 알아서 한대도. 저 점심시간 끝나가요. 다시 전화할게요. 백기는 신경질적으로 종료 버튼을 두드렸다. 급한 것처럼 전화를 받으라더니 갑자기 맞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작년에 한 번 해주고 나면 될 줄 알았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작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의 모친이 졸업 선물 대신 내밀었던 게 모 여대의 졸업 앨범이었더랬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든 백기에게 모친은 여기서 장래 신붓감을 무려 골라보라 했다. 연애에는 도무지 소질도 관심도 없는 아들내미를 걱정해 선택한 최후의 방법이라나 뭐라나.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한다고 다 만나주냐고요. 큰 맘 먹고 중매쟁이를... 아, 엄마! 이건 아니지. 내가 오늘내일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이건 진짜 아니지.”

“뭐가? 선?”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에 백기가 소스라치게 떨며 기겁을 했다.



“아, 한석율 씨!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깜짝 놀랐잖아요. 여기서 뭐 해요?”

“백기 씨 놀래켜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백기 씨 선 보나 봐. 나는 백기 씨 이렇게 보낼 수 없는데. 석율은 셔츠 위의 먼지를 털듯 백기의 어깨를 쓸었다. 데이트한다고 저녁에 술도 안 먹어주고 주말에도 안 나와 줄 거 아냐. 이렇게 아까운 백기 씨… 어떻게 보내나. 석율은 실연당한 사람처럼 슬픈 눈을 하고 백기를 보았다.  백기는 매정하게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은 겁니까?”

“처음부터. 다.”



석율은 과장된 몸짓으로 다를 표현했다. 백기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컵을 꺼냈다. 난 노랭이. 그리고 컵을 하나 더 꺼냈다. 하나는 머신에 밀어 넣고 하나는 석율의 앞에 턱 내려놓는다. 백기는 믹스 포장지를 뜯으며 말했다. 



“만약 한석율 씨라면… 만약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가정이에요. 좋은 선 자리가 들어오면 그래도 선보러 가겠어요?”

“보러 가.”

“에? 아 고민을 하고 대답을 해요. 그럼, 보러 간다고 치면… 그 사람한테 미리 본다고 얘기해줘야 할까…”

“미쳤어? 그걸 왜 얘기해.”



공든 탑 무너뜨릴 일 있어? 석율은 뜨거운 물을 컵에 붓고는 스틱으로 안을 천천히 저었다. 달큼한 커피 향이 휴게실에 퍼졌다. 백기는 수긍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누구야. 뭐 하는 사람이야.”

“뭐 음악… 악기 한대요.”

“아니. 좋아하는 사람 누구냐고.” 

“없다니까요. 가정이라고요, 가정. 나중에 선이 갖는 의미가 진지해졌을 때 그때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석율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못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백기는 자신의 커피를 내려다보며 그 시선을 피했다. 



“뭐 그럼 만나는 사람도 없다 하니. 주말에 2대 2로 미팅 어때. 백기 씨 스튜어디스 만나본 적 있어? 없지?”

“됐습니다. 관심 없어요.”

“장그래도 싫다, 장백기도 싫다. 우리 짱들께서 다 싫다고 하시니. 난 그럼 누구랑 가나. 안영이랑 가야지, 응?”

“제가 왜요?”



타이밍 좋게도 영이가 휴게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기는 영이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석율과 스튜어디스 사이에 함께 위화감 없이 앉아 있을 장면이 문득 떠올라 픽 웃음을 지었다. 



“백기 씨, 왜요?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요?” 

“아, 아닙니다.” 

“하하, 영이 씨. 안녕-! 이라고 말은 못하겠네...”



그러더니 석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석율은 곤란한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데는 고단수였다. 영이는 이제 남은 백기를 보고 있었다. 백기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휴게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온 백기는 해준의 옆모습을 보며 좀 전에 석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처럼 해준에게 굳이 미리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해준과 자신은 명확한 관계도 아니거니와, 구구절절한 사연은 해준 쪽에서 오히려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었다.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하는 겁니까? 해준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알리지 않는다 해도 비밀일 필요까지는 없다. 해준 정도의 나이라면 선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 테니까. 


휴대폰이 깜박거리더니 화면 중앙에 메시지와 함께 작은 사진이 떴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발신된 것이었다. 백기는 옆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열었다. 예쁘다. 보자마자 든 생각은 그거였다. 그가 좋아하는 선한 인상의 여자였다. 백기는 문득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를 좋아하면서 여자가 마음에 들 수도 건가? 하지만 불과 반 년 전의 그와 자신은 완전히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강해준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거절할 거니까.






“스무 살이 넘으면 아빠보다는, 오빠가 필요하죠.”



푸웁- 마시던 차를 뱉을 뻔한 백기는 티슈로 젖은 입가를 닦았다. 얕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앞에 앉은 여자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대기업 다니시는 건 어떠세요? ㅡ 전세 자금 대출은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요즘엔 승인이 까다로워졌다고 해서요. ㅡ 저는요, 되도록이면 결혼은 빨리하고 싶어요. ㅡ 맞벌이는 딱 질색이에요. 모양도 빠지고…. 



백기는 차를 마시는 내내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무사태평한 한 해를 떠올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연례행사에 가까운 이 미션을 일단 무사히 수행하고 나면 해가 바뀌기 전까지는 잠잠할 터였기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앞에 있는 사람이 강해준일 거라 끊임없이 눈에 최면을 건 덕분이었다. 장백기 씨, 전세 자금은 마련했습니까? 지금 이것 모은 것 가지고 서울에 집을 사자고 하는 겁니까? 맞벌이니 집안일은 반반으로 나눠서 하죠. 해준의 말투를 상상하니 실제로 웃음이 나올 뻔하여, 몇 번을 고개 숙이고 빈 잔을 기울여야 했다. 




백기는 카페를 나와 시계를 한 번 보고서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차만 마시고 헤어진 탓에 시간이 꽤 남았다. 끝의 그 망언만 아니었어도 -아이는 아들, 딸 둘이었으면 좋겠다는- 가볍게 한잔하러 가려고 했는데. 다른 걸 하긴 애매하게도 이곳은 사무실 밀집 지역이라 주말엔 한산했다. 백기는 멀리 보이는 몰을 보며 생각했다. 영화라도 볼까. 






“이런 데서 보네요.”



그리고 영화관이 입점해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에 거짓말처럼 만나서는 안 될 그를 만나고 만 것이다.



사내 카페에서 헤드헌터를 만났던 걸 들켰던 때처럼 백기는 해준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맸다. 하물며 옆에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밖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는 건데. 백기는 진정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머리를 긁는 손짓과 피하는 시선에서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대리님 여긴 무슨 일로…….”

“저는 집이 이 근처입니다.”



백기는 이 동네가 큰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주택가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해준이 이 근처에 산다는 걸 희미하게 들은 것 같기도. 실제로 해준은 편안한 옷차림에 대형 마트의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선 봤나 봐요?”

“아니, 그, 네.”



휴일에 정장 차림. 근처에는 방금 그가 나선, 맞선 장소로 유명한 호텔 카페가 있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래요. 내일 봅시다.”

“저, 대리님.” 



돌아서려는 그를 불렀다. 돌아보는 얼굴이 차가워 백기가 흠칫 놀랐다. 



“왜요. 할 말 있습니까?”

“저는… 부모님 부탁으로 나온 거구요. 대리님이랑 저는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보러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을….”  



눈에 띄게 굳어지는 해준의 얼굴을 보며 백기는 자신이 말실수를 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쏟아진 말은 주워담기에 늦었고도…. 



“장백기 씨한테 좀 실망하려는데요.”

….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해준은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그를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보다가 이내 뒤를 돌아 가버렸다. 

백기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




얼음 몇 개가 글라스 안에서 뒹굼과 동시에 그 위로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해준은 반이 못 되게 채워진 잔을 들고 가볍게 흔들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두꺼운 커튼이 암막처럼 창을 막은 데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했다. 해준은 이 비밀스러운 아지트 같은 자신의 집을 좋아했다. 생각과 계획을 정리하는 데 적합한 공간. 해준은 조용한 거실 가운데 앉아 섞지 않은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리는 이미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지만 가슴은 여즉 진정되지 않은 채 뛰고 있었다. 


그 길로 단숨에 집까지 걸어왔다. 곧바로 자신을 불러 세울 거라 생각했던 백기는 그 뒤로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장백기가 따라오건 말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억지로 마주해봤자 언성은 높일지언정 당장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터였다. 



‘왜. 나는 왜 화를 내고 있지.’



해준은 대체 자신이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백기가 맞선을 본 사실? 필요하다면 자신은 그것을 백 번도 할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의 맞선은 결혼과 귀결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장백기는 어떨까. 나는 장백기가 여자를 만나는 것이 두려운 걸까? 장백기가 다른 사람들처럼 선을 보고,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아니… 불안했다. 장백기는 제 손안에 있지 않았다. 해준은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펴 보았다. 장백기는 저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 진실과 맞닥뜨렸을 때 과연 자신이 그것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준은 그 또한 자신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가진 것의 종류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먼저 알아챈 것은 해준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백기가 영영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다. 하지만 해준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장백기는 벽을 높게 쌓아 둘수록 쌓인 벽을 두들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벽을 허물어 서로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맞은 편에서 백기는 벽을 두들겼다. 그리고 애절하리만치 구걸에 가까운 신호를 무시할 만큼 해준은 모진 사람은 못되었다. 


벽은 허물렸다. 벽은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허물어졌다. 뒤늦게 무너진 잔해 위로 벽돌을 다시 쌓는다 해서 그것이 다시 처음과 같은 벽이 될 리는 만무했다. 두통이 밀려왔다. 해준은 눈을 감은 채로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지르다 테이블에 놓인 두통약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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