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단문1 # 未生 2015. 1. 4. 12:19

해준백기




따라 들어올 때부터 어째 불안하다 싶었다. 슬픈 예감은 왜 늘 틀리지 않는지. 복사기가 돌아가며 소리를 내는 동시에 백기가 헉, 하며 무릎을 접었다. 그가 쓰러지는 줄 알고 놀란 영이가 팔뚝을 잡자 이제는 그것이 단전까지 울린다. 이거 들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며 바닥을 딛고 간신히 허리를 펴자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백기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장백기 씨 무슨 문제 있습니까?”



필히 이 사태의 원인일 그. 지금은 그 XX라고 불러주고 싶은 인간. 복사기에 등을 대고 뻔뻔하게 자신을 위아래로 훑으며 묻는 해준의 물음은 조금 전 사무실에서 ‘장백기 씨 메일 보냈습니까?’ 하던 그 건조한 어투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 쓰러지려는 데도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는 거야? 아아, 그렇지. 당신이 지금 이렇게 만든 거지. 



“백기 씨 지금 얼굴 진짜 창백해요.”

“괜찮습니다……. 저는, 윽.”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사람 불러다 줄까요?”



백기는 안에 든 것을 밀어내려고 필사적으로 뒤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진동하며 예민한 곳으로 자꾸 밀려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끈을 잡고 빼내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여기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백기는 다리에 번갈아 힘을 주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위치를 잡아보려 했다. 그러다 잘못하여 어느 지점을 건드린 건지 하마터면 허리를 튕길 뻔했다. 백기는 이제 다른 위기에 봉착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흥분한 것이 고개를 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앞을 가렸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안영이를 보고 있자니 등을 돌려 보이지 않는 강해준의 얼굴이 어떨지 보지 않아도 훤히 상상이 된다. 



“영이 씨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고 가주면 안 될까요?”



부탁이에요. 백기는 영이의 눈을 보며 애원했다. 영이는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백기를 정말 두고 가도 되는 건지 고민되었지만, 그의 눈빛이 간절해 그러겠다고 하고 말았다. 알겠어요. 자리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백기는 그녀가 나가고서도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입구를 노려보았다. 돌아가던 복사기가 작동을 멈추자 휴게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휴대폰 진동소리와도 같은 것이 백기의 뒤에서 끊임없이 울려댈 뿐이었다. 백기는 숨을 고르다가 곧 얼굴을 굳히고 복사기 앞에서 여유롭게 자료를 보고 있는 그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대체 왜…이러시는…겁니까……!  ” 

“안영이 씨랑 즐거워 보이길래. 잊었나 본데, 네가 왜 그걸 꽂고 출근해야 했는지, 되새겨주려고.”   



벌 받는 중에 말이야. 해준은 백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음절 음절을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백기는 기가 찼다.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그깟 질투심에 그랬다고? 



“제가…여자 안 좋아하는 거…아시지 않습니까…….”



억울함에 새된 목소리가 나온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들키기라도 했다면 영이는 앞으로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휴게실에서 난데없이 발기한… 변태? 잠재적 치한? 관계가 영영 틀어져 버릴 수도 있었다! 혹여 여사원들 사이에서 소문이라도 나면……. 과연 고개를 들고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 그는… 자신이 없었다. 백기는 이제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줄어들었다. 



“너 대학 때 사귀었던 여자애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은지? 은수?”

“…또 그 얘기입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제가 여자를 사귈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구요. 그래서 손수 실험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자 가슴 만져도 안 서는 거……. 백기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를 꽉 깨물고 소리죽여 말했다. 뒤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진동이 잦아들었다. 백기는 팔에 얼굴을 묻고 끼잉- 하는 소리를 냈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해준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앞섬을 가린 백기의 손을 치웠다. 부피를 키운 것이 정장 바지 위로 팽팽하게 부풀어있었다. 해준은 자켓을 벗어 백기의 아래를 둘러주고는 그의 어깨를 부축해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백기의 귀에 낮은 음성이 속삭여졌다. 백기는 그 목소리에 어쩐지 웃음이 서려 있다고 생각했다. ‘가자, 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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