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반려 3 # 未生 2015. 1. 3. 15:05

3.


“잘 만났다. 강 대리야. 담배…는 끊었지. 나랑 커피 한잔 해.”

“커피 아까 마셨어.”

“그럼 나 혼자 마실 테니까 옆에 있어.”



코너에서 동식을 마주친 해준은 별안간 손목이 붙잡혔다. 손목을 비틀어 빼내는 것으로 그에서 벗어났지만 마주한 진지한 눈빛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동식은 해준을 데리고 휴게실에 들어가려다가, 복사하는 장그래의 뒷모습을 보고는 도로 나왔다. 여긴 안 되겠네. 그가 중얼거리자 그래가 뒤돌아 목을 빼고 두 사람을 쳐다본다. ‘밖은, 춥겠지.’ 두 사람 모두 셔츠 차림이다. 고심하던 동식이 결국 찾아낸 곳은 비상계단이었다.    



“뭔데. 바빠. 빨리 얘기해.”



동식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해준은 저 얼굴을 안다. 자신에게만은 다 털어놓아 보라는 표정. 동식을 포함한 몇몇은 신입 때부터 말하지 않는 강해준을 두고 동기들보다 두 살 어린 그가 말 못하는 고민들을 혼자 끌어안고 있을 거라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성의는 고마웠지만 해준은 언제나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내는 편이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뭐가.”

“15층에 소문 쫙 났어.”

“그니까 뭐가.”



동식이 해준을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인사고과 발표 난 후로 애 잡는다고.”

“알아듣게 얘기 좀 해줄래?”



해준은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인사고과 이야기가 화두로 떠올랐던 술자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성준이 지나가는 말로 너는 당연히 A지? 하는 것에 해준은 정정이라도 하듯 “아니, B” 라고 답했더랬다. 이례적인 소식이라고 생각이라도 했던 것인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입을 타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렇기도 한 것이, 해준은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A 아래로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충격을 받았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암묵적으로 함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정작 해준은 떨어진 점수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이것이 상대적 평가이고,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고 모두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장백기 말이야.”



특정 인물의 이름이 거론되자 해준의 눈썹이 꿈틀댔다. 동식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너는 장백기한테 왜 그래. 해준은 동식이 던진 말들로 인과관계를 맞추어본다. 인사고과에서 자신은 B를 받았다. 이유는 모두가 A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장백기가 A를 받았기 때문이다. 강해준은 근래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심하게 장백기를 대한다.  



“그러니까 분기 실적이 좋았던 장백기 덕에 내 평가가 나빠졌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괴롭힌다?”



해준은 팔짱을 끼더니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럼 김 대리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걔한테 질투라도 해서 제발로 걸어나가게 만들려고 괴롭힌다는 거.”

“아니. 그런데, 맞아.” 

“……?”

“강 대리, 내가 걱정되는 건 장백기가 아니라 강 대리야. 나는 강 대리가 단순히 질투 나서나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오히려 반대면 모를까. 물론 잘 키워보고 싶은데 말을 안 들어서 강하게 하는 것도 있겠지. 근데 내 생각은, 그 방식이 과하지 않냐는 거야.”  

“……잘못 짚었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두 사람 모두한테 득 되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아.” 

“지금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나 불러낸 거야?”



해준이 무표정으로 손목을 들더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저번에 나한테 물어봤던 거 말인데, 혹시 그거…”

“김 대리.”



해준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다음에 얘기하자. 나 퇴근 전까지 업체에 연락 주기로 했어. 먼저 갈게.






해준이 자리로 돌아오자 백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다가왔다.  



“저, 대리님……. 아까 업체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신… 부탁드린다고.”

“알았어요.”



담당자가 사무실 밖이라고 해서… 여기 연락처입니다. 백기가 쭈뼛대며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해준은 모니터 앞에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전화기를 들었다. 백기가 옆을 빤히 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보란 듯이 눈을 맞추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하더니 고개를 푹 떨군다. 해준은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수화음을 듣던 중 동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지금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가?’ 



큰 소리를 낸 후로도 몇 번 더 잔 실수를 트집 삼아 화를 냈다.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감정적이 아닌 의도된 것이었다-그렇다고 해준은 생각했다- 화를 내는 이유는 대부분 기강을 잡기 위함이었다. 해준은 퇴근을 하다 로비에서 장백기를 기다리는 신입 셋을 발견했을 때 퇴근 준비 중일 그에게 전화를 해 업무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다음 날 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 순간 불쑥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백기가 흐트러지려고 할 적마다 해준은 그의 목에 매인 목줄을 조여댔다. 훈련과도 같았던 반복적 학습 끝에 중구난방으로 콩밭을 뛰놀던 그는 이제 목줄을 풀어 주어도 곧게 걷는다. 장백기는 강해준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 옆에서 끊임없이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그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야근을 하고 잡념을 없앤 듯 표정을 지우자, 해준은 그제야 만족스러워졌다.  




동식이 ‘그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막았던 것은 자신만의 견고했던 믿음이 와장창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였다. 선물을 예쁘게 포장한다고 해서 내용물은 달라지지 않는다. 선물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해준은 영원히 그것을 열어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답은 이미 알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동식이 애프터까지 갔다던 올해의 마지막 선에서마저 뻥 차였을 때 몇몇이 모여 위로연을 가장한 송년회를 열었다. ‘내가 뭐가 모자란 걸까’ ‘한 번만 더 만나보면 나의 매력을 알 수 있을 텐데’ ‘내 짝은 어딘가에 존재는 하고 있겠지?’ 동식의 하소연은 잔을 여러 번 비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다 못한 해준이 말했다.



‘왜 멀리서 찾아? 주변을 잘 둘러봐.’

‘…….’

‘처음 본 사이에 차 한 번 마신 걸로 인연 찾는 게 욕심 아니야?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게 맞지 않나.’ 



말을 마치자마자 준식이 피식 웃었고 성준이 오이스틱을 해준의 입에 넣었다. 바보야? 사내연애하게? 똑똑한 척 다하더니 이거 맹탕이네 맹탕. 뭐? 아- 오뎅탕 너무 졸였어. 짜잖아. 물 좀 더 부어달라고 하자. 발끈한 해준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그의 입은 이번엔 은행 꼬치로 막혔다. 그의 발언은 결국 취한 사내들 속에서 허튼소리로 묻혀버려 해준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준은 세면대에 서서 물을 틀었다. 동식이 따라 들어왔다. 해준이 손을 씻으며 거울로 그를 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비해 눈은 또렷해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해준을 보며 동식이 쓰게 웃었다. 오늘 같은 날은 취하고 싶은데 취하지도 않네. 해준이 핸드타월을 뽑아 손가락을 꼼꼼히 닦으며 말했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응. 뭐.’

‘왜 사내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강 대리.’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내가 궁금해서 그래.’



휴- 한숨을 쉰 동식은 진짜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해준을 향해 말했다.



‘그게, 선입견이라는 게 있거든? 필터라고 해야 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사무적으로 대하면 싸웠다, 느슨하게 풀어주면 와이프라고 특별 대우한다, 내가 본 커플 중에 백이면 백 둘 중 하나는 그만뒀어. 결혼 생활 안줏거리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



그리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 해준에게 동식은 그렇게 말했더랬다.



‘근데 너, 사내연애하고 싶냐?’




……






“할 일 남았어요?”

“다 됐습니다. 이것만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습니다. 퇴근…하십니까?”

“마무리 지어요. 집까지 태워다 줄게요.”

“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먼저…퇴근하십쇼.” 

“오늘 약속 있어요?”

“아니요.”

“그럼 타고 가요. 늦었으니까.”

“…….”



내키지 않았지만 더 거절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백기는 해준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한 번 타봤다고 익숙한 내부에 백기는 제 차를 탄 것처럼 자연스럽게 벨트를 늘여 맸다. 오른쪽으로 밀어 넣어야 제대로 잠기는 벨트도, 그 언젠가 하염없이 노려보았던 조수석의 서랍도, 창 너머로 보이는 사이드미러의 희미한 얼룩도 모두 익숙한 것이었지만 백기에게는 이 자리가 더할 나위 없이 불편했다. 검정 브리프케이스를 소중한 것인 양 끌어안고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앉았다. 백기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해준이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



“춥습니까. 히터 좀 더 틀어요?” 

“추운 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얼굴 금방 빨개지더라고. 온풍에 예민한 것 같아서 약하게 틀었어요.”



그리고 침묵. 집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신호에 걸려 정차했을 때 간간이 해준이 말을 걸어오는 것 외에는 같은 침묵이 유지됐다. 백기는 어색하게 네 혹은 아니요 로 대답하며 끊임없이 남은 거리를 생각했다. 한 블록, 좌회전, 그리고 세 블록. 이제 여기서 좌회전. 그때 좌회전을 해야 할 차가 그대로 직진을 했다. 백기가 몸을 돌려 지나친 길을 보며 말했다.  



“어, 이쪽이 아닌데……!”

“아 그래요? 그럼 지나친 김에 드라이브나 할까요?”



백기는 허무하리만치 평온한 해준을 보았다. 처음부터 다른 곳에 갈 예정이었나? 왜 말을 안 했지? 혹여 자신이 거절할까 봐서? 백기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머릿속으로 물음을 띄우고 있을 때 그의 차는 이제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눈부신 야경을 보며 백기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해준이 길가에 차를 대는가 싶더니 가게에서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사서 돌아왔다. 백기는 건네받은 따뜻한 캔을 두 손으로 쥐었다. 차가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백기 씨는.”

“…….”

“내가 불편하죠.” 



저 스스로도 좋은 선임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해준의 말에 백기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하는 것밖에는 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손끝으로 커피의 온기가 퍼져나가며 온몸의 근육들이 이완된다. 백기는 뻣뻣한 자세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세우고 있던 허리를 자동차 시트에 묻었다.  



“백기 씨 전에 두 명이 제 밑에 있었습니다. 한 명은 중공업 팀에 있는 이 대리고 한 명은 작년에 본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백기가 운전석의 해준을 보았다. 해준은 전방에 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완벽한 후임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둘 다 성실하고 착했죠. 그리고 둘 다 제 직속은 아니었습니다. 저번 종무식에서 인사드렸던 박 과장님 직속이었어요. 이 대리도 박 과장님이 데리고 가신 거고요. 따지고 보면 백기 씨가 제 첫 직속 후배인 셈입니다.” 



그리고 뜻밖의 사실에 놀랐다. 백기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해준의 첫 직속후배라는 것을. 자신 외에도 해준의 아래에 신입 몇 명이 거쳐 갔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 대해선 알지도, 알려고 생각지도 못했다. 해준이 그들과 백기를 비교하려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몰랐겠지만 백기 씨는 철강팀에 올 예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원이 필요하다고 계속 얘기해오던 상태였고 차 과장님이 장백기 씨를 인턴 때부터 찍어뒀으니까요.” 


“그리고 차 과장님께서 제게 백기 씨를 잘 키워보라고 하셨습니다.” 



강이 보이는 한적한 공터로 들어서자 차가 멈췄다. 해준은 캔을 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날씨 탓인지 그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백기는 커피를 마실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식은 기둥만 쥐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이미 해준이 했던 말들로 포화상태였다. 해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방금 했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야 했다. 왜, 나에게, 이런 말을.



“장백기 씨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저는 화가 납니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통제하고, 내 손안에 두고 싶습니다. 해준은 이 와중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본심에 웃음이 난다. 



“안 그러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못되게 굴었던 건 잊어줬으면 좋겠고, 특별히 섭섭했던 게 있었거나 앞으로 바라는 게 있으면 지금 이야기해주세요.”

“저는…대리님이 왜…… 갑자기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몰랐는데, 마음과 다르게 표현이 항상 엇나가고 있더군요. 그거에 대한 사과라고 해두죠.” 

“…….”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없습니까?”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해준은 백기가 이야기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커피만 만지작거리던 백기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대리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한 발자국 다가가면 열 발자국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대리님께 다가가는 게 무섭습니다. 더…멀어질까 봐요.”

“내가 거리를 둔다고 생각하네요. 이해합니다. 아까 한 대답으로는 와 닿지 않습니까?”

“…아, 아니요. 대리님 마음 충분히 알고있…”

“저는 당신을 아끼고 있고 그런 만큼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

“미안했습니다.” 



해준은 그렇게 말하고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커피를 쥐고 있는 백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백기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해준은 백기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입술에 말캉한 게 닿는 것을 느꼈다.    



“뭡니까?”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온도가 느껴지기도 전에 금세 떨어졌고, 어느새 조수석으로 돌아간 백기는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는지 스스로도 패닉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백기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일념하에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해준에게 손목이 붙들렸다. 백기가 해준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백기의 안경을 벗기고 얼굴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






차라리 평일이었으면 억지로 마주할 수라도 있지, 백기는 강제로 집에서 유배 중이었다. ‘연락 안 할 셈인가.’ 한참을 울리지 않는 휴대폰 붙잡고 그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반짝반짝 빛나길 바랐다. ‘강해준대리님’ 이라고 적힌 대화창을 띄워 본다. 조심히 들어가시라는 자신의 메시지를 끝으로 답장이 없다. 해준이 연락을 해야 할 의무가 있지는 않을 거라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섭섭함은 감출 수 없다. 



‘그래... 고작 키스한 것 가지고 유난이다.' 



고작… 고작? 강해준은 고작 1년 중 200일 이상을 보는 직속 선배다. 그런 사람과 키스한 것 가지고 자신은 유난을 떨고 있는 것이다! 백기는 대자로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그가 액션을 취해주길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손안에 든 휴대폰을 다시 쳐다본다. 여전히 텅 빈 화면에 김이 팍 샌다. 보지 않으려고 부러 멀리 떨어뜨려 놓아보려고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이 혹시 메시지가 왔을까 달려와 확인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매트리스 위를 좌우로 굴러다니던 백기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다시 대자로 엎어졌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운동이라도 해야겠다. 



1km를 막 뛰었을 때 앞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백기는 페이스를 늦추며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제 눈을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기구에서 재빨리 내려온 백기가 서둘러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대리님?”

-백기 씨. 집이에요? 지금 나올 수 있어요? 근처인데.

“네.”

-괜찮아요? 그럼 ××건물 △△에 있을게요.

“네.”



백기는 그대로 샤워실로 뛰어들어 몸과 머리만 빠르게 씻어내고 5분 거리의 카페로 들어섰다. 해준은 막 나와 김이 나는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일찍 왔네요? 그는 백기를 보고 갸우뚱하더니 곧 반색해 맞았다. 백기는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옆으로 연신 쓸어넘기며 해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자신을 천천히 훑어 보는 것이 느껴졌다. 

 


“집에서 오는 거 아니에요?”

“네. 헬스장… 다녀오는 길입니다.”

“하다가 나온 거예요? 운동하는데 괜히 불러낸 거 아닌가 싶네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었습니다.” 



백기는 자신의 앞에 있는 해준을 보며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해준은 친구가 근처에서 가게를 하고 있어 들렀다가 그가 주변에 사는 게 생각나 연락해보았다고 했다. “다행이네요. 얼굴, 괜찮아 보여서.” 해준은 자신이 생각나 연락을 하고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까지 하고 있다. 백기는 오전까지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것이 전부 부질없이 느껴졌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응당 치러야 할 과정이었던 것처럼 흐르듯 넘어갔고.



“얼굴 보러 왔어요.” 



해준은 남은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내고 일어났다. 백기도 외투를 들고 해준을 따라나섰다. 바깥 공기는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찼다. 내일도 잘 쉬고, 월요일에 봅시다. 


하지만 백기는 해준의 인사를 듣자마자 머리가 핑도는 것 같았다. 해준을 보기 위해서 또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뎌내야 할 시간들이 막막했던 것이다. 다른 생각을 들기도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저기 강 대리님.” 돌아서려던 해준이 백기를 보았다. 일단 불러 세우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저희 집에서 차 한 잔…하고 가시겠습니까?”   

“우리 지금 차 마시고 나오는 길 아닌가?”  

“아……. 저, 그럼…저녁…….”



붙잡고 싶다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백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들켜버린 이상 거절당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백기는 머뭇거리며 떠오르는 아무 단어들을 말했다. 그게,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먹을만은……. 해준은 그제서야 백기의 의도를 알아채고선 그에게 다가왔다. 



“좋습니다. 가죠.” 


해준의 얼굴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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