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반려 5| # 未生 2015. 1. 17. 18:56
5.
철강팀의 점심시간은 해준의 펜이 연필꽂이에 들어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해준은 외근으로 일정이 빠듯하지 않으면 홍 대리, 장백기와 점심을 같이 했다. 구내식당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가는 일이 드물었기에 오늘도 남자 셋이 향한 곳은 근처의 식당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세 사람의 시선은 식당 벽면에 걸린 TV에 고정되었다. 사회 이슈에서 사건 사고, 추워진다는 저녁 날씨를 지나 모 연예인의 열애설까지. 그러고 보니 몇 층의 누가 요새 연애를 한다더라. 줄 잇듯 이어지는 대화. 백기는 간간이 맞장구를 치는 것 외에 별말 없이 식사만 했다.
“전 커피 생략할게요. 이따 마실 것 같거든요.”
식당을 나서자마자 홍 대리가 말했다. 오후에 미팅이 있어 먼저 사무실로 올라가겠다는 뜻이었다. 생각 없이 있다 보면 하루에 몇 잔을 마시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회전문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건물 앞에는 해준과 백기 둘만이 남았다.
“저희도 올라갈까요?”
“우리는 커피 한잔 하고 올라가죠.”
카페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온 직장인들로 북새통이었다. 백기는 죽 늘어선 사람들을 세어보다 그 줄의 끝에 섰다. 주문을 받는 직원의 능숙한 스킬로 줄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백기는 앞사람과의 간격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앉을 자리 하나 없이 카페는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점심시간을 틈타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점심시간까지 업무로 머리를 맞댄 사람들. 이곳에서 입을 떼지 않는 사람은 자신과 제 사수뿐인 것 같았다. 마침내 백기의 차례가 왔을 때 백기는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바닐라 라떼 하나…….”
“바닐라 라떼 하나,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해준은 백기의 말을 가로막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나온 커피를 받아들고선 번잡한 카페를 나섰다. 해준은 백기를 바람막이가 있는 야외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추운 날씨 탓인지 식후 담배를 태우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전망이 가장 좋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제만 해도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바람이 불지 않으니 겨울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춥지는 않죠? 해준이 묻는 말에 백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펄펄 끓는 라떼에 입을 가져다 대려던 백기가 컵을 내리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그날엔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사과받자고 데리고 나온 건 아닌데.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해준은 쥐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백기는 발끝을 보며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서 어떻게, 잘 됐어요?”
“그런 건 아닙니다. 진지한 자리는 아니었구요. 차만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백기 씨 나잇대에서 오가는 선 자리 이야기가 큰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셨어요? 백기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다. 표정 변화를 눈치챈 해준이 그를 빤히 보며 다시 말했다.
“백기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궁금하네요.”
“뭘… 말씀이십니까?”
“그날 백기 씨가 변명이랍시고 나한테 했던 말.”
“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뭐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리님도, 우리 관계도.”
우리의 관계라는 단어에서 백기는 그 의미에 자신이 없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해준의 눈만은 바로 보고 대답했다. 해준도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바로 본다. 백기의 눈은 핑계나 변명이 아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뭘 모르겠단 말인가. 아직도. 이제는 조금 답답해지려고 했다. 이런 소모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백기를 데리고 나온 건 아니었는데.
“백기 씨는 끊임없이 확인받고, 인정을 받아야 안심하는 스타일입니까?”
백기는 여전히 해준을 보고 있었다. 건조한 공기에 눈이 뻑뻑해도 결코 눈을 감지는 않았다.
“혹은 내가 백기 씨에게 믿음을 못 주는 스타일인가 보네요.”
이번엔 긍정하는 것처럼 눈을 깜박. 눈가에 물기가 돌며 건조함이 사라졌다. 동시에 시선이 흩어진다. 백기는 고개를 돌려 도심에 들어찬 빽빽한 건물들을 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장백기 씨가 나를 믿을 수 있을까요.”
별안간 해준이 백기의 손을 잡았다. 백기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가락 한 개를 잡았다. 그리고는 손가락 밑동을 가볍게 흔들더니 말했다. 뭐, 이런 식으로 확인받길 원하는 건가요? 음?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거… 아닙니다…….”
말은 아니라고 했어도 본질에서 바라는 건 그게 맞았을지도 몰랐다. 확신이 없다. 지금의 자신은 그랬다. 혼자 좋아하다가 기대하고, 결국 실망하게 되는. 끝을 알기에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좋음과 기대 사이 그 어드메 쯤 있으려나.
“정신 들고 보면 저만 착각하고 있었던 그런 상황이요. 저는 그렇게 되는 게 싫습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한 번 들어나 보죠.”
그 순간 백기는 해준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하고, 좋다고 하면 하기라도 할 셈인가? 어쩌다 수라도 틀리면 네가 결정한 거라며 책임을 나에게 온전히 지우고? 저기 대리님. 숨을 고르며 반박할 말을 고르던 중 해준의 주머니에서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강해준 대리입니다. 네, 네.” 해준은 전화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들고 백기를 옆눈으로 보았다.
“들어가야겠네요.”
해준이 일어나며 얼떨결에 백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준은 망설임 없이 건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백기는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다가 먼저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해준이 14층과 15층을 동시에 눌렀다.
“가는 길에 내려서 최 과장님 만나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14층에 도착했을 때 해준이 백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방금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하는 걸로 하죠.” 그리고 백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그대로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린다. 멍하게 보고 있던 해준의 등이 철문으로 닫혔다.
회의가 길어지는지 해준은 한참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료를 가지러 두 번 정도 자리에 왔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는 동분서주하며 다니는 중이었는지 숨이 거칠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백기에게 오후에 할 일을 주며 다섯 시 경에 자신이 전화를 하면 회의실로 물건 몇 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네. 내일 회의에 쓸 자료는 아침에 볼 수 있도록 구비해 놓으라 지시했다. 네. 그리고 노란 머그컵에 담은 냉수를 소리 없이 마시며 자신이 너무 늦으면 먼저 퇴근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
백기는 오늘 해준에게 더는 못하겠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흐물흐물한 이 관계가 더 진전되기 전에, 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깨끗하게 정리할 셈이었다. 그러려면 오늘 안에는 꼭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는 오후 늦도록 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대로는 싫습니다.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백기는 끝내는 것도 싫었다. 끝을 보는 것은 두려움에 가까웠다. 앞으로의 일들이, 자신이 다룰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들이.
‘그렇다면 나는 대리님을… 강해준을…….’
백기는 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들리지 않는 마음속으로도 할 수 없는 말이 존재했다. 강해준 대리 당신은 대체 뭐길래. 그의 이름표가 고개를 돌리면 닿는 거리에 있다. 백기는 그것을 잡아 뜯어 바닥에 던지는 상상을 했다. 긴 한숨을 쉬고는 안경을 거칠게 벗어내고 마른세수를 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아, 영이 씨.”
영이가 백기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아까부터 여기 계속 서 있었는데 저 안 보이는 것 같길래.”
“그래요? 아, 미안해요. 몰랐어요. 잠깐 다른 생각 하느라.”
“퇴근 아직이에요?”
백기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6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오후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한 탓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도 몰랐다. 다시 보니 영이는 외투에 가방까지 영락없이 퇴근하는 모양새였다.
“가야죠. 근데… 아직 마무리할 게 남아서요.”
모니터에 뜬 보고서는 제목과 날짜 이후로 텅텅 비어 있었다. 얼마 전 해준이 연습시킨다며 작성해보라고 한 보고서였다. 수없이 써 본 사업계획서였건만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비단 잡히지 않는 건 보고서뿐이 아닐 터였다. 제 마음도, …강해준도. “먼저 들어갈게요.” 영이는 그에게 목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백기는 유리 너머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영이를 무심코 보다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아직 안 갔네요?”
해준은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족쇄처럼 목에 매어진 넥타이부터 풀었다. 넥타이를 푼 다음에는 셔츠 가장 윗단의 단추를 하나 풀고, 푼 넥타이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둘둘 감아 가방에 넣었다. 퇴근 전 그에게 의식과도 같은 절차였다. 백기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변명하듯 대답을 했다.
“할 일이 남아서요.”
백기가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모니터는 깨끗해져 있었다. 이게 왜 이러지. 앉으며 무엇을 건든 건지 공들여 만든 표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백기가 마우스를 쥐고 이곳저곳을 눌러댔다.
“문제 있어요?”
“이게 뭘 잘못 눌렀는지 없어졌는데….”
“저장은 했어요? 이리 줘 봐요.”
마우스를 쥔 백기의 손 위로 그의 손이 포개졌다. 그리고 얼굴이 어깨 부근에 바짝 붙었다. ‘무슨..!’ 백기는 파티션 너머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체크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반대편 셀에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영업 3팀 쪽에는 누군가 있을 수도 있었다. 숨소리가 곁에서 생생히 느껴질 만큼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가 자신의 목 근처에서 더운 숨을 뱉을 때마다 제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갔다. 해준은 백기의 둥근 어깨에 손을 얹고 팔꿈치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는 그대로 굳어 파일 이것저것을 만지는 해준이 하는 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녁 같이 할까요.”
“네, 아니요. 아니, 네…….”
해준은 대답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백기는 눈을 질끈 감더니 어깨에서 해준의 손을 떼어냈다.
“아니요.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대리님. 더는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여러 번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다 알아들으니까. 백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과 후회가 섞여 있었다. 그럼 대신 갈 때 내 차 타고 가요. 그것까진 괜찮죠? 해준이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키보드를 두어 번 눌렀다. 만들었던 표가 다시 나타났다.
“됐네요.”
해준의 몸이 떨어졌다. 백기의 아래턱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의 백기라면 회의는 잘 끝났는지, 내일은 자신도 들어가는 지, 업무에 관해 말을 붙여올 법 했지만 오늘은 창밖으로 고개마저 돌리고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의지로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해준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고 이따금 네비를 보며 저장된 백기의 주소를 흘끔거릴 뿐이었다. 해준의 차는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멈춰 서고도 백기는 벨트만 만지작거리며 쉽게 내리지 않았다. 그때 해준이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두 입술이 맞닿으려는 찰나에 백기는 결국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해준은 손가락으로 제 아래에 있던 버튼을 눌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백기 씨.”
백기가 문을 열고 나서려는 때에 해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
“내일 봅시다.”
“네.”
문이 닫혔다.
대문을 열고, 2층인 자취방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중에도 해준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백기는 애써 그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현관을 열었다. 현관이 닫히기 직전, 차 안에 있는 그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울고 있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샤워를 마치고 적당히 저녁으로 먹을 것을 찾아 냉장고를 열었다. 오늘은 기필코 장을 보려 했는데 해준의 차를 타고 오느라 그것도 깜박했다. 하는 수 없이 백기는 컵라면을 꺼내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담배를 태우러 베란다에 나온 백기는 그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아직도 안 갔어?’
해준의 차가 아까 본 그 자리에 그대로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시동은 꺼져있었지만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다리라든지 그림자를 보아 안에 사람이 있는 것도 같았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지 백기로선 알 수 없었다. 상관할 바 아니지. 주변에 일이 있는 걸지도. 백기는 담뱃갑에 담배 개비를 다시 집어넣고 방으로 돌아왔다. 끓는 물을 컵라면에 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크롤을 내려 볼 만한 영화를 찾았다. 전에 보다 깜박 잠이 들어 뒷부분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있다. 백기는 그것을 재생했다.
눈앞의 영화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백기의 신경은 온통 밖에 있는 해준의 차와 그 안에 있을 해준에게 쏠려 있었다. 왜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해서는. 백기가 쯧 혀를 차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있는지만 확인하자. 없으면 말고, 있으면……. 결국 백기는 외투를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의 공기는 확연하게 차가워져 있었다.
눈가에 손을 동그랗게 말고 태닝이 옅게 된 창안을 들여다보았다. 해준은 팔짱을 끼고 젖힌 좌석에 누워 있었다. 움직임이 없어 얼핏 잠든 것처럼 보였다. 백기는 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차 안을 살폈다. 창 네 개가 모두 닫혀있고 계기판이 반짝거리는 걸 보아서는 히터가 틀어져 있는 듯했다. 히터……. 아차, 안에 히터가 틀어져 있다면……. 얼마 전 뉴스에서 본 질식 사고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리님?”
똑똑 창문을 두들겨 보아도 해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들리나. 주먹으로 창문을 더 세게 두들겼다. “대리님.”
‘뭔가 잘못됐다.’
백기는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대리님! 대리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해준이 누워있는 창 앞으로 갔다. 잠든 해준의 얼굴은 평온했다. 설마, 안 돼…. 안 돼……. 백기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아, 신고, 신고를. 백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장백기 씨?”
해준이 눈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기는 기적을 본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준을 보았다. 해준은 몸을 세우더니 운전석의 잠금을 풀었다. 백기는 서둘러 반대편으로 가 차 문을 열었다. 차 안에는 미미한 온기가 있었다. 눈 좀 붙인다는 게, 깜박 잠이 들었네요. 백기는 목이 뻐근한지 어깨를 움직여 펴는 그를 노려보았다. 히터 틀어놓고 주무시면 어떡합니까. 이번엔 목을 양옆으로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내던 해준이 백기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해준은 이 상황이 이해 가는 듯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중앙의 계기판을 가리켰다. 히터에는 타이머가 맞춰져 있었다. 항상 자동 설정되어있습니다. 더운 걸 싫어해서요. 백기가 꺼진 히터를 조심스레 누르자 타이머가 작동했다. 그는 양쪽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종종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는 강해준이 원인터 동직급 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잊곤 했다. “그리고 한 두 시간 밀폐된 곳에서 자는 걸로 죽진 않을 겁니다.” 백기는 허탈하게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안 가셨습니까.”
“이대로 가면 정말 끝이겠구나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걸음이 안 떨어졌습니다.”
백기는 고개를 떨구었다. 해준은 목욕 후 막 말려 보송한 머리칼과 어린 옆모습을 보았다. 그는 전에 없이 알아달라고, 봐 달라고 애타게 신호를 보내며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지만 이 덜 자란 신입은 제 마음을 알 턱이 없다.
“지금도 모르겠죠?”
“네.”
“장백기 씨 인턴생활 얼마나 했죠?”
“3개월 했습니다.”
3개월. 해준은 3개월이라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3개월. 그럼 앞으로 저랑 매주 하루씩 10번만 만납시다. 뭐 수습기간이라고 치고.”
“네?”
어이없는 그의 제안에 백기는 눈썹을 찌푸리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3개월, 10번, 수습기간? …뭐에 대한 수습?
“만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데이트를……하자고요?”
“생각하기 나름이죠. 조건은 업무 외 시간과 장소입니다.”
외근, 출장, 점심시간, 야근을 위한 저녁식사 전부 제외하고요. 백기는 쉽게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그의 말을 곱씹어야 했다. 그러니까 해준이 지금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하는 건가? 이 기간에 제 마음을 얻어 보겠다는, 10번 찍어서 넘어가는지 안 넘어가는지 보겠다는, 뭐 그런 거? 백기가 어이없이 웃었다.
“누가 인턴인 겁니까? 기간이 끝났을 때 고용…을 결정하는 건 누가 되는 겁니까?”
해준은 핸들 위에 올린 손을 까딱거리며 그 끄트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백기를 보았다. 백기는 본능으로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선 경악했다.
“차차 알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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