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반려 6| # 未生 2015. 1. 28. 01:38
6.
밤새 온 함박눈으로 길이 꽁꽁 얼어 있었다. 해가 뜨기도 전,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백기는 얼음길에 구두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었다. 가로등 불빛에 길이 반짝거렸다. 매끈하지 않은 곳을 찾아 걸으면서도 금세 밀려오는 잡념에 하마터면 미끄러져 넘어질 뻔도 했다. 간밤의 일 때문이었다. 백기는 해준을 보내고도 한참 잠자리를 뒤척였다. 해준의 황당한 제안에 입만 어버버하고 있을 때 창밖으로는 눈이 내렸더랬다. 어영부영 얼버무리려다가 “그럼 하겠다고 하는 걸로 알게요.” 하고 해준이 말해 승낙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날 오후만 해도 안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어 놓고선, 하자는 대로 또 하는 제 모습이란. 백기는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역 안으로 들어오자 온기가 훅 와 닿아 매여 있던 목도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뒤척임은 비단 걱정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설렘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나 열차에 오르며 백기는 생각했다. 우위에 선 기분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해준의 제안으로 균형을 맞춘 셈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마치 고백이라도 받고 교제하기로 결정한 다음 날처럼 설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임에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닌 아침. 마지막으로 이 기분을 느낀 게 언제였는지 속으로 셈을 해본다.
꿈이 아니다. 출근길에 매일 읽는 책이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백기는 미련 없이 뚜껑을 덮어 그것을 가방에 넣었다. 만약 해준이 정식으로 고백을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고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져 백기는 철제봉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고등학생과 눈이 마주쳐 헛기침을 큼큼하고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건물 앞에 도착한 백기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7시 50분. 로비는 한산했다. 점등을 시작하지 않은 구역도 있어 다소 어둡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백기는 이 고요함이 즐거웠다. 한 시간 후 이곳은 전쟁터가 될 터였다. 늦잠으로 평소보다 늦게 나온 날에는 엘리베이터 몇 개를 보내야 겨우 탈 수 있었다. 만원 지하철을 타는 것만큼 땀 냄새로 가득한 만원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그로서는 딱 질색이었다. 15층까지 엘리베이터는 단숨에 도착했다. 백기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수첩을 열고는 체크해놓은 일정이 없는지부터 확인한다. 오늘까지 마쳐야 하는 일은 없다. 백기는 비어있는 칸을 보며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가 날짜 옆에 작게 써넣었다. [+1]
해준은 언제나 정시에서 5분 일찍 출근했다. 5분 일찍 출근, 5분 늦게 퇴근. 일정한 그의 출퇴근에 백기는 처음 봤을 적 해준이 유부남인 줄 알았다. 집에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냐? 하고 누군가 그에게 농담하기 전까지 말이다. 식사 때 너머로 듣기로는 퇴근 후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 듯 보였다. 가끔 홀로 영화를 보러 가거나 주말엔 사우나를 가는 게 전부. 정말 그게 전부일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그의 옆자리에서 생활해온 것치고는 강해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컴퓨터 세팅까지 마친 백기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건 후 휴게실로 향했다. 커피를 내려 마실까 컵을 밀어 넣는데 기계가 묵묵부답이다. 백기는 깜박거리는 화면을 검지로 두들기다가 아래 서랍을 열었다. 사람들 참, 없으면 채워놔야지. 익숙한 손놀림으로 콩을 붓자 붉은색으로 깜박이던 화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백기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버튼을 눌렀다.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빈 휴게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백기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고 다시 사무실로 나왔다. 이른 시각부터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들려온다. 발걸음 소리와 곳곳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한데 섞이며 사무실은 금세 활기를 띠었다.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었다.
해준은 평소처럼 일어나 인사하는 백기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정도로 답을 한 뒤, 뭐가 바쁜지 앉기도 전에 거래처와 통화를 했다. 예상은 했지만, 원래 알던 강해준을 분명히 확인받은 것 같아 백기는 약간 맥이 빠졌다. 전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인가 하고 추측을 했는데 이제는 그냥 천성이 무뚝뚝한 사람 같다.
“백기 씨. 코트라 자료 갖고 있는 거 지금 메일로 보내 봐요.”
그런 게 분명하다.
**
“공지 뜬 거 봤어?”
“하 대리님 결혼 소식이요? 저는 인턴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참, 부조 누구한테 보낼 거야. 아니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복사를 하러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석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왠지 있을 것 같더라니. 16층에 있어야 할 한석율을 15층에서 보는 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안쪽에는 영이와 그래가 이미 와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석율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있었는데 바빠 무시했던 차였다. 집합시켜놓고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래는 돌아가 회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막 도착한 백기에게 인사를 하고서 자리를 떴고, 영이는 컵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뭔데요. 백기는 석율의 얼굴을 보지 않으며 복사기에 서류를 꽂았다.
“연.찬.회.”
연찬회? 백기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전 직원이 회사의 발전을 위해 일 년간 진행될 업무를 논의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 석율은 숨도 안 쉬고 문장을 한 번에 말했다. 그러려면 부서 간의 돈독, 친밀함이 필요하지. 모르는 사람끼리 어떻게 일을 하나. 석율이 백기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백기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물러섰다. 고로 친목을 다져야 한다는 거지. 석율은 다시 현란한 제스쳐를 보였다. 기계는 혼자 일하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요. 협업.
“영이 씨.” 그가 영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인사팀 정 대리랑 아는 사이지? 저번에 같이 밥 먹는 거 봤는데. 돈가스.”
영이가 반색을 하며 석율을 보았다. 저번에 한 번 먹은 게 다인데, 한석율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석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그런 게 있지.
‘정 대리.’ 백기도 익히 들어 아는 이름이었다. 정 대리는 인사팀의 홍일점이었다. 그녀는 젊은 남직원들에게 얼굴이 반반하면서 쉽게 곁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로 유명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실은 팀의 남자들이 그녀를 싸고돌아 타 부서 남자는 접근조차 못한다는 게 진짜 핵심이었다. 그쪽 팀원들이 성냥불에 기름을 부어 모닥불로 만들었으니 뭇 남성들의 정복욕을 자극하기 시작했다나 뭐라나.
“한석율 씨는 내가 누구랑 무슨 밥 먹는지 뭐 그런 거까지 알아요?”
“왜. 당연하지. 누구랑 뭐 먹었는지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백기가 코웃음을 치며 말이 되냐고 거들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랑 먹거나 먹고 싶은 사람끼리 먹는 거죠.”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인 거 몰라? 모든 정치는 밥에서 시작하는 거야. 가만 보면 우리 백기 씨는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하는 건지…”
그 학교는 어떻게 들어갔다가 나온 건지……. 석율이 허공을 보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을 흐렸다. 에? 뭐라구요? 백기가 반박하기 전에 영이가 석율에게 물었다.
“왜요? 정 대리님한테 고백이라도 하려구요?”
“나는 자신 있어. 공략법을 알 거든.”
“…….”
“뭐야. 왜 웃어. 그 웃음의 의미는 뭐야. 안영이. 말해 봐. 뭐 아는 거 있지.”
“아니요. 뭐, 잘 해보시라구요.”
“아무래도 우리 영이 씨와 긴밀하게 나눠야 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영이 씨, 우리 아래 카페에 가서 따뜻한 차 한잔 할까요? 제가 한 번 살게요.”
차마 어깨를 만지지는 못하고, 다정하게 그 위에 팔을 두른 석율이 백기에게 윙크를 하며 나갔다. 백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복사물을 꺼냈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백기는 인트라넷을 새로 고침 했다. 그리고 연찬회에 관한 공지를 첫 문단부터 꼼꼼하게 읽었다. 꽤 먼 곳이었다. 1박을 해야 했고 대상은 전 직원. 왜 석율이 이걸 기회라고 생각하는지 알 법했다. 언제 가는 거지. 날짜를 보니 한 달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수첩에 체크를 하는 중에 해준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백기 씨.
“IT영업팀 박 대리 알죠. 주면서 상황 설명해주고. 넘겼던 자료는 다시 안 받아와도 돼요.”
“아, 넵.”
두툼한 파일을 받아든 백기는 파일 위의 낯선 봉투를 발견했다. 회사 로고가 박혀있었지만 분명 자신의 이름-장백기 씨-이 적혀있었기 때문에 그는 앉아있는 해준을 한 번 흘끔 보고 그것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봉투 속엔 오늘 날짜의 공연 티켓이 있었다.
“……대리님, 이건.”
“야근 안 하려면 서둘러야 할 겁니다.”
해준은 웃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원인터 강 대리로 빠르게 돌아와 분주하게 타이핑을 했다. 아, 네, 네. 백기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파일 더미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백기는 얼떨떨한 기분에 자신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로 복도에 서 있었다는 걸 한참 뒤에 깨달았다. 뭐지 나 지금 데이트 신청받은 건가. 유리문 너머의 해준이 이쪽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백기는 다시 봉투에서 표를 꺼냈다. 연극 티켓이다. 안 그래도 보려고 직접 찾아보기까지 했던 공연. 우연이겠지만 들어맞은 아귀에 기분이 더 얼떨떨해졌다. 백기는 입가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엇.”
“아,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발을 뗀 백기는 안에서 나온 사람들과 부딪히고 말았다. 들려있던 파일이 바닥을 굴렀다.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들어가려던 탓이었다. 부딪힌 사람은 영업 3팀의 김 대리와 장그래였다. 장백기 씨 미안해. 동식이 사과를 하자 백기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백기는 바닥에 떨어진 파일을 주웠고 옆에 있던 그래도 거들었다. 헉, 티켓. 봉투를 집어 든 백기는 전까지만 해도 쥐고 있었던 티켓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부딪히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친 듯했다. 앞에 있는 그래가 마침 그것을 집어 든 차였다. 백기는 그래의 손에 들린 티켓을 빼앗듯이 가져가고는 대충 목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리님. 요즘 회사에서 연극 표 뿌립니까?”
“아, 그거 연극 표였어?”
“네.”
“장백기 씨 요즘 얼굴도 좋은 게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 보다. 그지?”
“흠. 아닐 텐데요. 그랬다면 한석율 씨가 제일 먼저 말했을 텐데 근래에 그런 얘긴 없었고…. 그리고 저 연극 말인데요, 강..”
“장그래.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남의 일에 함부로 숟가락 놓다가 잘못하면 독박 쓴다고 했지.”
그래는 그 말에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댔다. 그런 그에게 동식이 이마에 꿀밤을 먹이려 주먹을 가져다 댔다. 어, 오늘 향수 뿌리셨네요. 동식이 멈칫하는 듯싶더니 결국 그에게 콩 하고 꿀밤을 먹였다. 응, 그래 뿌렸다.
**
저… 사실은 이거 보고 싶었던 공연입니다.
“연극 좋아합니까? 취향을 몰라서 일단 유명한 걸로 고르긴 했는데.”
“네. 대학 때는 자주 보러 다녔는데 입사 후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나질 않아서… 많이 못 봤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영화였으면 팝콘이라도 씹으며 시작 전 무료함을 달랠 텐데 그러지도 못해 백기는 해준이 사온 생수만 연신 들이켰다. 목 타요? 아니요…. 결국 그렇게 먹으면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어질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백기는 뚜껑을 닫을 수 있었다. 유명한 극이라더니 평일임에도 만석이다. 해준은 백기의 옆자리에서 팸플릿을 유심히 읽고 있었다. 홍보의 지향점은 힐링인 듯했다. 백기는 해준과 힐링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어긋나있는 것 같아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곧 시작한다는 안내 음성이 나오자 두 사람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을 껐다.
장내가 천천히 암전되고 눈앞이 새카맣게 변한 그 찰나에 백기는 어두울 때 손이라도 잡아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했다. 애먼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언제 잡아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배우가 나타났고, 백기는 언제 그런 고민을 했냐는 듯 까맣게 잊고서 금세 극에 빠져들었다. 개그 프로를 봐도 절대 웃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해준은 때때로 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다. 바람 빠지는 것 같은 그의 웃음소리에 백기는 몇 번이나 옆자리를 흘끔대야 했다. 결말은 예상치 못한 비극이어서, 끝나갈 무렵 극장 안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백기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다. 볼을 타고 줄기가 흘러내리자 안경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의 앞으로 손수건이 쑥 내밀어 졌다. “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합니다.” 해준은 극장이 밝아진 후에도 백기가 진정하고 주변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두 사람이 나올 때쯤에는 출구에 사람이 몰려 혼잡한 틈에 해준의 뒤통수만 보며 따라가던 백기가 그를 놓치고 말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순간 백기의 손목이 그때 턱하고 잡혔다. 그리고는 몸이 트인 공간으로 움직였다. 밝은 곳에서 확인한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해준이었다. 백기가 숨을 돌림과 동시에 그의 손은 손목에서 떨어졌지만 백기는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작 전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던 자신과 또 한 번 강하게 그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 겹쳐지면서.
**
“앉아 있어요.”
저녁을 먹어놓고도 배가 고파져 두 사람은 늦은 밤 샌드위치 가게에 나란히 앉았다. 해준은 주문하려는 백기를 앉히고 자신이 일어섰다. 주문하는 곳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는 듯싶더니 곧 되돌아온다.
“백기 씨 채소 빼는 것 있습니까?”
“저는 할라피뇨요. 아, 피클도요.”
주문을 하고 가져와 팀원들에게 나눠주는 것 모두 항상 제 몫이었기 때문에 백기는 저 앞에서 줄을 서 있는 해준이 색다른 그림처럼 보였다. 제 기억으로는 해준은 살라미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에 올리브를 뺐다. 언젠가 왜 올리브를 안 먹느냐 차 과장이 물었을 때 그는 하마터면 먹던 샌드위치를 뱉을 뻔했더랬다. 무려 올리브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매운 걸 못 먹냐는 해준의 물음에 백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책망하려는 게 아닌 취향을 알아보려는 노력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와의 선택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어째 민망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해준은 샌드위치를 다 먹고도 백기의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왔다. 백기는 한사코 혼자 가겠다며 거절을 했지만 해준은 꿋꿋했다. “오늘은 내가 가자고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책임져야죠.” 라고 하며.
백기의 집은 버스 정류장에서도 몇 분 더 걸어 들어가야 있었다. 근처에 산이 있어 길을 빙 둘러가야 했기 때문에 고장난 가로등이라도 있으면 주변이 온통 칠흑이었다. 점멸하는 등이 몇 있는 걸 보니 조만간 또 어두운 길을 걸어야 할 것 같다고 백기는 생각했다. 찰박이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눈이 녹은 길은 더 이상 미끄럽지 않았지만 돌아가 신을 벗으면 구두 밑창이 홀딱 젖어있을 터였다.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백기는 그저 어두운 골목을 같이 걸어주는 해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대리님. 다음번엔 제가 모시겠습니다.”
비장한 목소리로 내뱉어 놓고도 단어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아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모시겠다니, 사모님도 아니고. 하지만 해준은 웃었다. 백기는 해준이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보았다.
“그럼 기대해도 되나?”
“그게, 기대까지는…….”
“어찌 되었든 이번 주말엔 힘들겠네요. 내가 하 대리 결혼식에 가봐야 해서.”
어느새 백기의 집 앞이었다. 두 사람은 대문 앞에 섰다. 그도 오후에 하 대리의 청첩장을 받았다. 새신랑이 되는 게 신이 나는지 요즘 하 대리는 하얀 이를 연신 드러내며 사무실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쳤다. 신입들끼리는 부조만 하는 것으로 익스큐즈 되었는데 절친한 대리들은 모여서 식장에 가는 모양이었다. 백기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거기. 저도… 같이 가면 안 됩니까?”
뜻밖의 물음에 해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듯싶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안 될 것도 없지. 백기가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들어가요.”
아, 백기 씨. 잠깐. 해준의 부름에 백기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해준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백기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그를 안았다. 백기는 굳은 채로 해준의 어깨 반대에서 입을 웅얼거렸다. 대리, 대리님. 애타게 불러도 보았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백기는 눈을 감고 그대로 해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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