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엑스맨au # 未生 2015. 1. 22. 21:39

해준백기




능력이 처음 발현된 건 백기가 유치원에 다닐 적이었다. 어린 백기는 공사장을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 어설프게 둘러진 천막을 걷어내고, 울타리 사이를 넘어가 높은 철근 위에 앉아 장비들이 일사분란히 움직이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다 현장감독의 호통이 멀찌감치 들려오면, 쏜살같이 달아나 천막 사이에 몸을 숨기곤 했다. 천막 뒤가 숨기 좋은 곳이라는 걸 아는 건 백기뿐이 아닌 듯했다. 걷은 천막 안에서 뿌옇게 일렁이는 연기와 그 사이의 인영을 발견했을 때 아이는 흡 하고 숨을 참으며 그 자리에 굳었다. 남자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백기를 흘끔 보더니, 심드렁하게 위험하니 집에 돌아가라는 말을 했다. 남자가 다른 이와 같이 성을 내며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안 아이는 슬그머니 경계를 풀었다. “위험하지 않은데.” 그리고 중얼거렸다.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철 구조물은 어른들이 입을 모아 경고할 만큼 위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백기가 몰래 공사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끌어당기고 때로는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말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 뿐. 어쩌면 말이 아닌 노래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백기는 생각했다. 유치원에서 배우는 꼭꼭 씹어요와 같은 노래가 아닌, 아버지의 서재에서 들었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와도 같은. 


사고는 운명처럼 발생했다. 인부의 실수로 철근 몇 덩이가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필 그 밑에서 백기가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정의 몸통만 한 철근 다섯 개가 십 층에서 연쇄적으로 부딪히며 허공을 갈랐다. 그것들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놀란 사람들의 의미 불명한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모래가 풀풀 날리는 사고 현장은 가히 참혹했다. 모두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구조대가 철근 사이에서 웅크린 아이를 발견했을 때, 놀랍게도 그의 몸엔 흠집 하나 없었다. 구조물은 백기의 몸에 닿기도 전에 모두 구부러지며 그를 감싸고 움막처럼 둘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특히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굳은 얼굴로 다짜고짜 먼지를 뒤집어쓴 백기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가오는 공사 책임자와 기자의 취재 요청을 거부하고 그대로 군중에게서 등을 돌렸다. 백기의 부는 아들을 인척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검사는 은밀히 이루어졌다. 천운으로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 사람들은 백기가 살 아이였기 때문에 죽음을 빗겨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기의 부는 백기가 살아남은 것이 우연도 기적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촌수 셈도 쉽지 않은 먼 친척 중에 요술을 부리던 자를 기억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몸의 색깔이 변하는 괴물 같은 이. 방에 있으면 몰래 숨어있다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는 식으로 장난을 쳤다. 그 장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화를 낸 것이 마지막 기억인. 이름마저 가물거리게 잊혀갈 때 쯤 우연하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정부에서 나왔다는 공무원을 따라간 후로 행방이 묘연하더니 무슨 실험을 당해 돌연히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곧, 백기의 검사 결과를 받아본 그는 관자놀이를 짚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돌연변이 양성반응. 종이가 천천히 내려가며 천진하게 병원 침대에 앉아 발장난을 치는 아이가 드러났다. 



돌연변이라는 단어 대신 초능력자나 혹은 마법사 따위의 단어를 썼으면 거부감이 덜하지 않았을까. 백기는 바로 누워 천장에 붙은 야광별을 세었다. 자신의 능력은 질병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10살 즈음에는 의지로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집안의 쇠붙이는 모조리 사라졌다. 집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건 철저히 금지되었다. 실수로라도 능력을 쓰는 날에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호되게 맞았다. 몰래 할 수 있는 건 지금처럼 자려고 누웠을 때 멀리 있는 휴대폰을 당겨 손안에 넣는 것뿐이었다. 금속을 다루고 제어하는 능력. 전부터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되니까 말이다. 




**




<철강 1팀> 사원증 뒤판에 적힌 팀 이름을 읽은 백기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은 이것과 뗄 수 없는 운명인 걸까.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듣곤 했던, 잡아다 생체실험을 하는 시절은 60년대의 이야기고, 그 후로 돌연변이를 대하는 시선은 많이 달라져 실제로 백기가 어렸을 때에도 처우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것이 전부 연막이라고 굳게 믿는 듯하여 백기는 고유의 능력을 등록하고 기관에 들어가는 대신 여느 평범한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대학에 진학해야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백기는 당연한 순서처럼 이름 난 기업에 입사했다. 그와 함께 본가에서 독립을 했는데, 뜻밖에도 집으로부터의 걱정이나 반대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을 하면 몰래 자신과 같은 이들을 찾아 나서거나 기관에 컨택을 할 것이라 꿈꿨던 막연한 것들이 어느 순간 제 머릿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일을 하기에 자신은 겁이 많았고, 운동을 못했다.      



“수납 샘플이 왜 이 모양입니까? 규격이 안 맞는 파이프가 섞여 있잖아요. 내가 여러 번 얘기했을 텐데.”


“갑자기 필요할 때 이런 식으로 정리 돼 있으면 누가 찾아 쓸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정해진 길을 저버리고 선택을 한 이곳, 철강팀 신입사원 장백기로서도 썩 순탄한 행보는 아니지 싶다. 기 싸움이라고 생각되었던 처음은 알고 보니 일방적인 무시였고, 그것은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당한 불합리한 처사였다(라고 백기는 생각했다). 기본이 안 되어있다는 말은 사실 핑계였다. 백기는 제 직속 사수인 강해준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입사 일주일 만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알고 난 후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험으로 다져진 처세술은 학창시절을 유연하게 보내는 데 훌륭하게 일조했지만, 불행하게도 이 강철같은 남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극단적인 판단까지 불러왔는데 바로 이직을 위해 헤드헌터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백기는 그것도 곧 해답이 아닌 걸 알았다. 그렇게 가까스로 이직의 유혹을 견뎌냈건만 저를 향해 쉴 새 없이 쪼아대는 부리는 멈출 줄을 모른다.  


뚜벅뚜벅 걸어 창고를 나가는 해준의 등을 보다, 백기는 바구니 속의 파이프로 고개를 떨구었다. 정리…해야지. 두툼한 장갑을 손에 끼워 넣고 하나를 들었다. 제법 무게가 나간다. 백기는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파이프가 허공으로 오르더니 있어야 할 자리 위로 둥둥 떠가다가 백기의 시선과 함께 툭 떨어졌다. 얼른 이것을 해치우고 오전에 쓰다만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했다. 이번엔 소매를 걷고 팔을 크게 썼다. 파이프들이 전부 오르더니 챙하고 마찰음을 내며 제자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 그리고 아까…….”



익숙한 목소리에 백기는 창고 문 쪽을 황급히 돌아보았다. 잊은 말이 있었는지 문에 기댄 백기의 사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공중에 떠 있는 파이프에 커다랗게 뜬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둥둥 떠 있던 파이프 하나가 툭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




‘보셨나. 보시긴 한 것 같은데.’


‘모르시나 보네. 아마 잘못 본 줄 아시겠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다행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은 비단 몸을 쓰다 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백기는 옆자리의 해준을 흘끔 훔쳐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저도 궁금해져 백기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본 줄로 아는 듯 안도하고 있었다. 물론 백기의 추측처럼 완벽하게 침착한 것은 아니었다. 당황하지 않고 할 말을 마저 내뱉고 나왔지만 등을 돌려나오는 와중에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장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력인가. 아니다, 염력을 가진 자들은 근처에만 가도 중력이 거꾸로 된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쩌면 금속을 다룰 수 있는지도 모르겠군. 두 달여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조금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감쪽같이 능력자인 걸 숨기고 들어온 새파란 신입. 하지만 해준은 백기가 유리문을 넘어들어오는 순간부터 그가 저와 같은 부류임을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장백기입니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 백기에게서 해준은 신입 특유의 패기와 자신만만함을 읽어냈다. 실패 없이 살아온 인생과, 내면 깊은 곳에 그늘진 외로움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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