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잠영 # 未生 2015. 2. 6. 15:44

잠영

해준백기




“이거 비쩍 마른 놈이 어째 동식이보다 더 무거운 것 같냐.”

“야-야-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리고 얘는 밀도가 높잖아.”

“거기 좀 씨게 들어주입쇼. 강 대리님 다리 다 끌립니더.”



늦은 저녁, 불 켜진 포차 앞 장정 셋이 해준에게로 붙어 한 걸음씩 내딛으며 그를 옮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호리호리해 가벼울 거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의식이 없는 몸뚱이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스펀지냐. 술 다 빨아들이게. 알아서 주량 조절하는 놈이라 평소보다 페이스가 빨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웬걸, 별안간 철퍼덕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포차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이 해준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생소하기도 생소한 광경이었지만 죽은 듯 움직임이 없어 나쁜 생각들이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먼저였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전조를 가지고 있다. 주정을 부리는 것과 같은 걸 말이다. 해준은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가 한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얘는 중간과정이라는 게 없는 거야? 



“강 대리 집 아는 사람 있어?”



성준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건데?



“아니.” 

“나도 몰라.”



차례로 본 얼굴들이 고개를 양옆으로 젓는다.



“그럼 집 비는 사람?”



오늘 부모님 와 계셔서, 아기 엄마가 안 좋아해, 야 우리 집 안 되는 거 알잖아. 여기저기서 알 법한 핑계가 들려온다. 



“방 잡지. 저번처럼.” 

“내일 출근인데, 다 같이 어떻게 방을 잡고 자?” 

“그럼 누가…….”



그때 해준의 코트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화. 전화 울린다.”

“강 대리 전화인데?”





**





크게 기지개를 켠 백기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불은 어느새 자신이 있는 구역 외에는 전부 소등되어 있었다. 빈 사무실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저녁엔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게 가끔은 무섭기도 하다. 백기는 휴대폰을 꺼내 와 있는 연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대리님은 지금쯤 들어가셨으려나.’ 해준은 동기 모임이 있다고 해서 일찍이 퇴근했다. 가볍게 한잔 하는 거라 했으니 지금쯤 파했을지.

근래 얼굴이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다. 골똘하게 상념에 빠져있는 때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불러도 대답 않을 적이 많아 어깨를 흔든 적도 몇 차례 있었으며 수시로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답지 않은 실수까지. 재무팀에 불려가 혼이 났다는 게 어제 아침이었다. 오늘도 대리들이 부러 만든 약속이었을 것이다. 백기는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회포라도 풀면서 기분을 정리하길 바랐다. 그래도 술 먹는 중에도 연락은 꼬박꼬박 해오는 스타일인데 오늘은 도착했다는 문자 후로 연락이 없다. 전화해볼까.



[어, 장백기 씨.]

“……김 대리님?”



긴 연결음 끝에 들린 것은 낯익은 목소리였다. 백기는 의아했다. 왜 해준이 아닌 사람이 그의 전화를 받는가 하며 지금 그가 급히 이어나가고 있는 이야기들은……. 조용히 수화기 너머의 사정을 듣고 있던 백기가 마지막으로 나직이 말했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장백기 씨. 혹시 강 대리 집 알아? … 강 대리가 좀 취했는데 … 어, 몸을 못 가눠 … 여기 강 대리 집 아는 사람이 없어서 … 백기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서울역 뒷골목을 헉헉대며 뛰었다. 이 근방인데. 백기가 두리번거리며 골목을 돌았을 때 멀찍이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가운데서 부축받는 해준. 팔이 양쪽으로 붙들린 채 늘어진 그는 보이지 않는 십자가라도 짊어진 모양새였다. 낯선 모습이었다. 안에서고 밖에서고 해준은 취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 대리님 데려다줄 수 있겠나?”

“네.”

“미안하게 됐다. 여기 다 사정들이 있어서.”

“결국 후배한테 떠넘기고 가네.”

“괜찮습니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해준의 집을 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흔히 연인 사이에선 보금자리는 늦게 공개하는 편이 좋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초대받지 못했다는 쪽이 맞았다. 원체 해준은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던지라 섭섭한 마음이 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준이 공평하다는 건 빠른 이해와 포기를 가져왔다. 다만 예외는 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볼 뿐이었다. 저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길 원하기라도 하는 건지.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나는 당신의……. 

공기는 점차 차가워지는데 택시를 타기 위한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해준은 벌어진 입 틈 사이로 하얀 입김을 내뱉고 있었다. 겨울에 들어선 지가 언제인데 해준은 아직도 얇은 코트를 입었다. 백기는 제 목에 둘린 머플러를 그의 목에 감아주었다. 자신의 차례가 오자 백기는 뒷문을 열고 해준을 밀어 넣었다. 어디로 가냐는 말에 백기는 고민 끝에 입을 뗀다. 신림이요.


택시에서 해준을 꺼내는 것도 일이었다. 부축할 때는 그나마 걷는 듯하더니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완전히 녹다운 되어 하는 수 없이 백기는 그를 둘러업어야 했다. 자신감 있게 한 발짝씩 내디뎠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다리가 후들댄다. 일로 바빠 운동을 쉬었더니 근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우, 어우 무거워.”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집 앞에서 내려달라고 할걸. 백기는 비탈길을 오르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작은 언덕만 넘으면 자신의 집이었다. 녹지 않은 눈들이 길가에 쌓여 있었지만 추위는 실감하지 못했다. 무겁기는 제가 더 무거울 텐데. 백기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으면서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렸다. 보통은 지금과 반대의 상황이었다. 취하는 쪽은 백기 쪽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필름이 끊긴 그를 바래다주는 것은 언제나 해준의 몫이었다. 업혔던 것도 두어 번쯤 되려나.



“대리님 그때 기억나십니까? 처음 저 데리러 오셨던 날이요.”


“치킨 쥐고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던 게 귀여웠다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 그때 처음 들어봤는데…….”



연애에 도달하기까지 그들에겐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부분은 용기가 부족한 백기가 술의 힘을 빌려 전화로 난동을 부리는 경우였고, 무시하거나 화를 낼 줄로 알았던 해준이 참을성 있게 그의 술투정을 들어주는 패턴이었다. [대리님은 제 전화 왜 다 받아주시는 겁니까? 기대하게 되게요.] 멋대가리 없는 후임의 고백에도 해준은 꽤 근사한 대답을 해주었더랬다. 그것이 승낙의 표현이라는 걸 끊기 직전에 알았지만. 그날도 여지없이 취해있었던지라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전화기를 붙들고 펑펑 울었던 마지막 기억만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백기는 침대 위에 해준을 조심스레 눕혔다. 고요히 잠든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나한텐 얘기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갑갑해 보이는 넥타이를 풀어내고 셔츠 윗단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이 와중에도 단전 아래로 끓어오르려 하는 무언가에 비죽 웃음이 나온다. 자신을 부서져라 안고 난 후 그가 했던 말이 여즉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널 이 안에 가두고 영영 못 나가게 하고 싶어. 가지마. 넌 어디 안 갈 거지? 그저 널찍한 등을 안고서 가만히 토닥여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그 날.


해준의 볼 위로 눈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백기는 티슈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았다.



‘내가 당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백기는 교제 직전, 해준이 그토록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망설이는지 알 수 있었다. 해준은 당시 연애도, 사랑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백기는 왜 그가 유능해져야만 했는지 단편적인 조각들로 지레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많은 인센티브가 어디로 가고, 몇 년째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대고 있는 것인지 또한. 



둘이 눕기에는 침대가 좁아 백기 자신이 아래에서 쪽잠을 자기로 했다. 웅크리고 누워 눈만 깜박깜박하고 있는데 위에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괜하게 걱정이 된다. 결국 백기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손가락에 와닿는 옅은 숨결에 안심하며 도로 얇은 이불 위로 몸을 누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방 안에서는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





가볍게 어깨가 흔들리더니 새벽 햇살이 그의 몸 위로 덮쳐졌다. 백기는 부스스 일어나 제 앞의 뿌연 인영을 멍하니 보았다. 손안으로 안경이 건네졌다. 백기는 그것을 받아 얼굴에 걸쳤다. 바닥에서 잔 탓인지 혹은 무리해서 근육을 쓴 탓인지 온몸이 뻐근했다. 으드득으드득. 목 근처에서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난다. 흔들리던 초점이 한 점으로 모이며 해준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신세 졌네요. 챙겨줘서 고마워요.”



멀끔한 얼굴로 셔츠를 정리하는 남자는 완벽하게도 평소의 강해준으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를 말리던 백기가 거울 너머의 그를 보았다. 여기저기 냄새가 배어 안 되겠는지 샤워까지 하고 백기의 셔츠까지 빌려 입었다. 이제 씻고 나온 그와는 달리 면도에 양치까지 마친 후 맬 타이를 고르는 중이었다. 저만 해준의 집에 가본 적이 없지, 해준은 이 집이 익숙하다. 그는 전에 두고 간 자신의 타이를 찾는 듯 서랍 아래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세탁하는 걸 잊은 백기 덕에 그 타이는 안에 없을 것이다. 백기는 애써 그것을 모른 척했다. 


결국 해준이 고른 것은 (백기의 것이 분명한) 무난한 색과 무늬의 타이였다. 그렇게 준비를 다 마치고도 말없이 앉아 한참을 백기가 하는 모양새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백기는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도 좋다는 무언의 의도를 내비쳤지만 해준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닿아있는 느낌이 든다면 침묵이라도 좋았다. 서로가 있는 듯 없는 듯, 각자의 일을 차례로 마친 그들은 마지막으로 정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신을 신기 직전에 백기는 제 앞의 등을 예고 없이 끌어안았다. 



“……뭡니까. 할 말 있습니까, 백기 씨.”

“드릴 말씀은 없고……. 잠깐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요?”



그리고선 백기는 가만히 해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향수를 뿌리지 않은 그의 목덜미에서 살 내음이 났다. 백기가 움직일 생각을 않자 해준이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더 늦으면 둘 다 지각할 겁니다.”

“아직 출근 시간 많이 남았는데요.”

“아침 먹을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은 대중교통을 타고 가야 합니다. 해준은 안겨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백기를 조용히 보더니 드러난 이마 가운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뗐다. 백기는 만족한 듯 해준의 허리에 감은 손을 풀었다. 이제 됐습니다. 

그래도 나는. 나는 당신의…연인. 백기는 눈을 접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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