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에릭]| # X-men 2016. 7. 17. 16:29
AU/단문
유리 벽을 가운데 둔 분리된 방에 두 남자가 있다.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유리로만 만들어진 감옥은 무념을 위한 공간이었다. 색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공간은 그곳에 잠시 머무는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는 공기가 목을 옥죄는 듯한 경험을 안겨 주었다. 찰스는 마이크의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 가느다란 에릭의 손목에 걸린 플라스틱 수갑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그는 에릭에게서 어떤 냄새가 났는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이곳에 막 들어왔을 때보다 눈에 띄게 뺨이 야윈 에릭은 고개를 사선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내일은 레이븐이 올 수 있을 거야. 널 많이 보고 싶어 해.”
“…….”
“잠자리는 어때? 불편하지 않게 해달라고 했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찰스의 눈을 피하고 있던 에릭이 별안간 바람 빠진 웃음을 내었다. 찰스는 비로소 마주한 그의 녹색 눈동자가 회색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입을 축이며 유리 벽 너머의 에릭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에릭. 자백하고 합의서를 써.”
“싫어.”
“네 그…활동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야. 장관께 부탁해놨어. 이렇게 매일 찾아올 수 있는 것도 그분 덕분이야. 그러니 합의서만 쓰면.”
“쓰면. 그래서. 네가 바라는 게 뭐야. 고맙다는 말은 아닐 거 아니야?”
“다른 의도는 없어. 나는 내 친구가 풀려나길 바랄 뿐이야.”
찰스는 모난 에릭의 말을 눌러 담고 덤덤히 받아쳤다. "친구?" 에릭은 화를 내려는 기미가 보이는 찰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제 말을 이어갔다.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지, 찰스. 하지만 넌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지. 네 방식은 우릴 모두 천천히 죽일 뿐이야."
에릭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찰스를 노려보았다. 찰스는 순간 에릭의 눈동자가 다시 색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무취와 무채색인 공간에 빛나는. 두 개의 눈.
**
에릭이 방안의 불을 밝혔다. 어지럽혀진 책상 위에 소포가 놓여있었다. 홀로 쓰는 방임에도 그는 괜스레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소포는 꽤 묵직했다. 안엔 수백 장의 인쇄물들이 들어있었다. 에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소포를 소중한 것인 양 껴안았다. 그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에릭은 황급히 품 안의 인쇄물들을 침대 아래 공간으로 쑤셔 넣었다. 대꾸 없는 안의 상황에도 노크를 한 사람은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지가 묻은 손을 털고선 에릭이 문을 열었다. 환한 미소의 찰스가 방 앞에 서 있었다.
“영화 보기로 한 건 잊지 않았겠지?”
찰스가 두툼한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비디오와 맥주 두 병을 함께 꺼냈다. 에릭이 눈을 찌푸렸다.
“학교 안에선 술을 마시면 안 돼.”
“이건 되고 말이지.”
찰스가 침대 아래 공간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종이 더미를 끌어냈다. 에릭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저지하려 했으나 찰스가 조금 더 빨랐다. 그들 중 하나를 낚아챈 찰스가 빼곡히 적혀있는 상단부를 소리 내 읽었다.
“‘인간들은 보호라는 목적하에 우릴 지배하려 한다’ 에릭, 누굴 말하는 거야?”
“이리 줘, 찰스.”
“네 신경이 온통 침대 아래에 가 있던걸.”
찰스는 자신에게서 빼앗은 종이를 다시 침대 아래로 욱여넣는 에릭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정신능력자인 찰스에게 무언가를 숨기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에릭이 숨기려던 것에 대해선 더 묻지 않고 대신 가져온 비디오를 플레이어를 재생했다. 그리고 침대에 등을 기대며 여전히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에릭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에릭은 얇은 입술을 깨물며 찰스의 곁에 앉았다.
찰스가 가져온 건 에릭이 좋아하는 영화였다. 영화가 도입부에 접어들자 에릭은 조금 전의 작은 소동은 잊은 듯 화면에 집중했다. 찰스는 이런 식으로 에릭의 환심을 샀다. 에릭이 좋아하는 곳에 데리고 가고, 에릭이 좋아하는 그림을 보러 가고, 에릭이 좋아하는 차를 함께 마시고. 모두 그를 만난 첫날에 꿴 취향들이었다.
‘에릭, 반가워. 나는 찰스 자비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내가 모르는 건 없어.’
그 말에 얼굴을 굳히고 쌩하니 지나가 버린 에릭은 아이들의 말을 인용해 말해 보자면 '반 학기나 뒤처져 입학한 주제에 콧대가 높았'다. 찰스는 그가 어려운 형편에 후원자를 찾느라 입학이 늦었다는 걸 금세 깨달았지만, 누구에게도-심지어 에릭에게도-알게 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에릭은 언제나 찰스의 첫인상을 무례한 텔레패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데, 학교 최우등생들의 동지애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애정을 가진 자의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에릭은 열기가 오르는지 반도 더 남은 맥주병을 내려놓고선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찰스는 그런 에릭의 옆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고른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왔는데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은 영화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찰스는 에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취기 때문인지 에릭의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그런 에릭에게 찰스는 이번엔 더 용기를 내어 어깨를 쓸었다. 스웨터에 올라온 보푸라기들을 하나씩 만져보다가 그 아래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주물렀다. 어깨와 목 주변에서 배회하던 손은 허리춤으로 내려와 스웨터 안으로 들어갔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굴곡진 허리를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상상했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다. 마른 허리는 적당히 근육이 잡혀 있었다. 찰스가 자신의 몸을 만져대는 동안에도 에릭은 묵묵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 뜨거운 숨을 내뱉자 에릭은 그제야 찰스를 본다. 찰스는 주저 없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에릭은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찰스는 그의 정신을 만지지 않고도 키스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바지 위로 부푼 에릭의 것을 문지르며 그는 에릭을 침대로 끌어 올렸다. 에릭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찰스는 그가 순순히 자신을 받아들인 이유를 알았다. 그 또한 자신과 같은 마음이길 바라며 오래전 그의 꿈에 이와 비슷한 장면을 넣어두었던 것이, 금세 그 꿈을 잊을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찰스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가 이내 에릭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어차피 휴일에 에릭을 찾는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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