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데이빗] 불시착 # X-men 2016. 8. 7. 17:31

X:AP(2016) X Prometheus(2012)



0. 불시착


까만 하늘 위로 위성과 별이 뒤섞여 빛을 내는 가운데 별 사이를 가르고 유성이 떨어졌다. 섬광과 함께 저택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새들이 푸드덕대며 날고 먼 저택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으나 웨스트 체스터 남부의 공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누구도 그곳에 우주선이 추락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은 침실로 향하는 길에 계단 아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등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굳이 귀띔 해줄 필요는 없었다. 심상치 않은 대화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은 꽤 심각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알려야 해.' '누구한테?' '교수님들은 주무시고 계셔!' 진은 걸음을 돌려 계단에서 내려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니?" 그녀가 나타나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더니 곧 너나 할 것 없이 진에게 달려들어 말을 쏟아냈다.


"세탁실에 사람이 있어요!"

"그자요!"

"쉿."

"얘들아, 진정해. 한 명씩 이야기해 볼래? 바비, 아래 누가 있다고?"


바비가 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진은 바비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에릭 랜셔요." 진은 뜻밖의 이름에 움찔하고 놀라고 말았다. 찰스의 오랜 친구이자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던 사람, 첫인상은 후자였지만 그와 보낸 짧은 시간 동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에릭은 전자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은 에릭이 학교에 머무는 동안 찰스가 결코 본 적 없이 들떠 있었다는 걸 잊지 못했다. 그런 그가 지하의 세탁실에 나타났다는 말에 놀란 이유는 에릭은 몇 달전 학교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보았니?"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그는 죽었어!"

"죽은 게 아니야! 눈 깜박거리는 걸 봤어."


죽은 게 아니냐는 한 아이의 말에 진을 둘러싼 아이들 중 몇 명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바비는 그가 죽은 게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쯤 되면 제힘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은 아이들을 서둘러 침실로 돌려보냈다.

찰스는 늦은 저녁 진의 방문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학교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이 시간에 진을 보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진. 아직 자러 가지 않은 모양이구나."

"교수님. 확인해보셔야 할 게 있어요."


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찰스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진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쓰며 찰스가 자신의 머릿속을 읽도록 했다. 확인해 봐야 할 그 일이라는 것이 에릭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찰스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럴 리가 없어, 왜냐하면 그는 지금….

찰스는 곧 결심한 듯 휠체어를 움직였고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저택의 지하는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지만, 기계실을 비롯한 설비로부터 안전하게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형식적 조치여서 실제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아마 주머니에 넣어둔 물건을 찾으러 왔다든지 그랬을 거예요." 지하실에 들어선 진이 쿰쿰한 냄새에 코를 씰룩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주변에선 기계가 윙윙대는 소리와 찰스의 전동 휠체어가 굴러가는 소리, 그리고 진의 발소리만이 지하실을 메웠다. 진은 의아했다. 지하로 완전히 내려온 순간에도 인간의 자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은 신중하게 사방을 둘러보다가 바닥에서 지하 중앙까지 이어진 마른 물 자국을 발견했다. 덜 마른 물 자국의 끝은 세탁실의 내부였다. 찰스와 진은 그곳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의 말처럼 덜그럭대는 세탁기 사이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에릭이 아니었다. 

그를 보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찰스도 그가 에릭과 매우 닮아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는 짙은 녹색의 비행 슈트를 입고 있었다. 옆으로 넘긴 금발은 땀처럼 보이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미동조차 없어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바비가 말한 것처럼 그는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진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읽을 수 없어요. 정신 능력자인가요?"

"아니야. 그는……."

"새로운 형태의 뮤턴트인가요?"

"아니."


찰스는 휠체어를 움직여 남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일정하게 깜박거리던 눈은 어느 순간부터 찰스를 보고 있었다. 녹회색 눈동자 안에 찰스의 얼굴이 담기고 찰스는 위구심 가득한, 그러나 막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말했다.


"그는 사람이 아니야."

"네?"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지?"


찰스의 물음에 그는 눈을 한 번 더 깜박이고 입을 열었다. 진은 그것이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독특한 억양이라고 생각했다.


"행성 탐사 중에 문제가 있었고 선원들과 함께 귀환하는 도중 불시착했습니다."

"다른 행성에서 왔나?"

"아닙니다. 전 로봇입니다."

"로봇? C-3PO같은 그런 로봇인가요? 하지만 당신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잖아요."

"C-3PO는 픽션에 등장하는 로봇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은 DAVID8입니다. 인간을 돕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탑재 로봇입니다. 제조는 지구에서 되었고 제조 공장은 모두 같습니다. 각각의 개체를 시리얼 넘버로 구분하기 때문에ㅡ"

"좋아, 알겠어. 데이빗. 일어날 수 있겠니?"


찰스는 C-3PO니 DAVID8이니 하는 이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신 로봇이라는 말에는 어떤 흥미를 끌었는지 잠시 눈빛에 반짝임이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빗은 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온몸이 젖어있었다. 일어난 자리에는 물이 흥건했다. 진은 오던 길에 왜 물이 마른 자국이 남았는지 알 수 있었다. 완전히 일어선 그는 진을 내려다 볼만큼 장신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는 얼굴에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미국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계시군요."

"실제로 이곳은 1980년대 미국이거든."

"그렇다면 저는 예언자인가요?"


찰스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진도 어떤 것이 연상되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그리고 찰스에겐 10여 년 전의 커다란 사건까지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이 로봇이 왜 하필 자신의 학교에 불시착하게 되었는지, 그 물음에 의도가 없는지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들에게 어떤 파장을 주었는지 모른 채 데이빗은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진, 행크를 불러와. 레이븐도."



1. DAVID


늦은 밤 행크의 연구실로 엑스맨의 주축 멤버들이 소집되었다. 행크가 데이빗을 검사하는 동안 진은 일찍 침실로 돌아갔고 꾸벅꾸벅 졸던 피터도 레이븐에게 등을 떠밀려 방으로 돌아갔다. 행크는 의사가 검진을 하는 것처럼 데이빗을 다루고 있었다. 레이븐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다가 피곤한지 벽에 기대어 목운동을 했다. 모인 게 자정 직전이었는데, 벌써 동틀 시간이었다. 워밍업이 끝나자마자 행크가 손뼉을 한 번 쳤다. 소리에 깨어난 레이븐이 어깨를 떨며 다리를 고쳐 섰다.

"믿을 수가 없어요. 완벽하게 로봇이에요."

지금 기술로 이렇게 만드는 건 불가능해요. 분해를 해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ㅡ 그리고 행크는 말을 멈췄다. 데이빗은 티셔츠를 꿰어 입으며 행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크는 다름이 아닌 그의 순수한 눈빛에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분해는 하지 않을 거야. 찰스가 데이빗을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자 행크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해하지 않을 거예요. 내려와도 돼요."

"고맙습니다."


데이빗이 짧게 대답하며 긴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행크는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이빗에게서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그럼 어떻게 하실 예정이죠?"

"웨이랜드 유한회사는 설립 전이기 때문에 지금 저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 둘 순 없어요.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보내온 걸 수도 있고."

"피터가 감시탑 근처에서 우주선을 발견했어. 우린 그걸 조사할 예정이야."


그렇다면 제 임무는 여기서 끝인 거네요. 행크는 손을 들며 말했다. 데이빗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그를 사용하지 않을 거란 표현이었다. 하지만 찰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전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이 하기 힘든 일이나 꺼리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린 이미 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교수님."

"아니, 사실. 나는 데이빗이 도와줬으면 해."

"교수님의 정확히 무엇을 도운다는 거죠?"

"난 생활하는 데 도움이 필요해."

"그건 이미 제가 하고 있는 일이잖아요."

"네게도 잘된 일이야. 고마웠어 행크, 앞으로 연구에 집중하도록 해."

"교수님ㅡ"


찰스는 고집을 부리는 행크를 구석으로 데리고 와서 데이빗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데이빗을 학교 밖으로 내보낼 순 없어. 그들은 우리가 데이빗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거야. 찰스의 말에 행크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데이빗이요, 하. 이름도 지어주신 거예요?"

"꽤 세련된 이름이지?"

"보통 기계에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구요."

"불행하게도 미래에선 그렇게 한다는구나."


행크는 연구용으로도 쓸 수 없는 정체 불명의 로봇을 자신의 비서로 쓰겠다는 찰스를 말리려고 했으나 끝내 교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최대한 해볼게요.' 행크는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찰스는 격려의 의미로 행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행크는 라텍스 장갑을 벗어 휴지통에 넣고 팔짱을 끼고 있는 레이븐에게 다가갔다.


"난 쟤, 아니 저게 싫어. 교수님은 저게 그를 닮아서 여기에 두려고 하는 거라고."


어느 쪽이든 이름을 말하는 것도 싫은지 행크는 몸서리치며 방을 나갔다. 레이븐이 동의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레이븐 또한 그가 에릭을 닮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방안에 들어오며 에릭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방안엔 찰스와 레이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어떻게 생각해? 찰스의 물음에 레이븐은 흠-하고 데이빗을 한동안 응시했다.


"인간을 닮은 로봇이라니. 굳이 필요한가? 그러니까 내 말은, 인간이 꺼리는 일을 대신한다면서 왜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느냔 말이야."


사실 그녀는 행크와 달리 데이빗을 활용하는 찰스의 쪽에 동조하고 있었다. 데이빗이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고 한순간부터 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구상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에릭을 닮은 외형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인간처럼 가르칠 수 있다면 엑스맨의 전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찰스는 엑스맨 영입에 대한 레이븐의 의견에 반대했다.


"레이븐. 우린 데이빗을 무기로 쓰지 않을 거야."


저는 전투에 적합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데이빗이 거들었다. 복잡한 규정 때문이라고 했다. "저는 시스템상 군인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그말에 레이븐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나도 볼 일은 없네. 레이븐은 시계를 한 번 보고는 하품을 하며 방을 나갔다.


문이 탁 닫히자마자 데이빗과 찰스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는 데이빗이 자신이 사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데이빗은 덤덤했다. 


"데이빗, 이곳에 머물고 싶니?" 


데이빗은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애초에 찰스는 데이빗을 한가지 목적으로 쓸 예정이었다.


"그래,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니?"



**



찰스는 데이빗을 자신의 정식 수행원으로 임명했다. 소식이 전해진 날 행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데이빗은 행크의 장비들을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데이빗이 지하 내 어떤 물건을 만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데이빗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리브로와 주요 실험실을 제외한 곳의 출입권을 얻어냈는데, 그건 찰스의 지시였다. 찰스는 기술 연구의 영역을 행크의 몫으로 두고 싶어 했지만 데이빗이 가진 미래의 지식은 공상과학으로 치부하기에는 수준이 높았다. 행크 또한 못마땅해하면서도 데이빗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요긴하게 활용하기로 했다.

데이빗은 홀로 과거에 떨어졌어도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로봇이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불시착 한 날 우주선에서 내려 곧장 세탁실로 간 것도 방전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원인은 기반이 낙후된 1980년대의 통신망 탓이었다. 데이빗이 있는 동안 저택 지하에선 큰 공사를 두 번에 걸쳐 해야 했다.


찰스는 데이빗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물어야 했다. 그것은 찰스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찰스는 자신의 의사소통 능력이 얼마나 고유의 뮤테이션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지 데이빗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데이빗은 인간의 지능과 행동양식 내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때때로 찰스가 예상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곤 했다. 그것은 데이빗이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찰스가 오감으로만 데이빗에게 반응해서였다. 데이빗이 말을 하거나 표정을 보이지 않으면 찰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찰스는 데이빗에게 자주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니? 찰스는 데이빗이 솔직하게 대답하길 원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질문에 회피하지 않았다. 찰스에겐 데이빗은 언제나 신비롭게 느껴졌다.

찰스는 데이빗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로봇을 사용하기 위한 설명서를 읽고 있었다. 데이빗이 출력해온 것이었다. 로봇인 데이빗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지는 광고문구를 지나 그래픽으로 간단히 설명된 데이빗의 지도를 보던 찰스는, 데이빗이 출고된 직후의 모습과 다른 것을 지적했다. 이것 봐, 외모를 지정할 수 있어. 머리카락도 바꿀 수 있고. 그 말에 데이빗은 가지고 있는 금발은 온전히 자신의 취향이며 손수 머리카락을 염색한다고 했다. 찰스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짙은 갈색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

"갈색 말씀이십니까?" 데이빗의 단순한 반문에 되려 찔린 찰스가 손을 저었다.

"네가 원하는 색이 아니라면 굳이 바꿀 필요는 없어."

"괜찮습니다. 저는 수단의 자아와 로봇으로서의 자아를 구분합니다."


찰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것참 반가운 이야긴걸. 찰스가 다음 단락의 소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특정인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완벽하게 흉내 내기도 한단 말이지. 찰스는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톡톡 두들겼다. 그것은 그가 하기 힘든 말을 꺼내야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에릭 랜셔 말인가요?"

"그를 아니?"

"절 처음 발견한 소년들이 저를 그 이름으로 부르더군요."


찰스는 설명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딱히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제가 그분과 닮길 원하시는군요. 찰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데이빗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해보세요."


찰스는 데이빗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에릭의 것은 좀 더 회색에 가까운 녹색이었지만 데이빗은 바다를 담은 유리알처럼 아주 맑은 에메랄드빛이었다. 찰스는 데이빗의 얼굴에 가려 사라지려는 에릭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애쓰며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와 자신의 기억을 꺼냈다.


"우린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가족과도 같은 레이븐을 제외하고는 처음 만난 돌연변이기도 했고."


우린, 정말 금세 가까워졌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찰스는 서로를 운명처럼 믿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우린 오랜 친구이지만 단순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어."

"성적인 관계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 이야기야. 애정 관계를 완전히 끊었을 때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지."


찰스는 에릭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만남에서부터 그러고 싶었지만 차마 에릭을 곁에 매어둘 수 없었다는 회한까지. 데이빗은 찰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고 때때로 메모하는 흉내를 냈다.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였다.



다음 날 데이빗은 머리를 짧게 다듬고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서 나타났다. 복도에서 그를 본 행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고 진은 흠칫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갔다. 레이븐은 20년 전의 에릭을 똑 닮은 데이빗을 보며 감탄했다. "에릭이 돌아오는 일이 없어야겠네."




2. 누구나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로봇인 데이빗은 매일이 그랬다. 찰스는 데이빗을 사유지 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두었다. 그랬더니 교정에서 외발자전거를 탄다든지 복도를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밤까지 이어져 학생과 교직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래서 찰스는 데이빗에게 방을 하나 내주고 모두가 잠든 시간엔 방에서 나오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불만을 잠재우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가진 데이빗을 방안에 가두는 것은 마치 그를 학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진 찰스는 그를 자기 방에 들였다. 데이빗은 처음엔 찰스가 자는 동안 멀뚱히 벽을 보며 서 있었다. 자는 모습을 지켜보면 행여 찰스가 불편해할까 봐서 라고 했다. "저는 침대에서 자지 않습니다." 자는 척이라도 해봐. 찰스는 데이빗을 침대에 누이고 자세를 고쳐주었다. 데이빗은 곧잘 따라 했다.


휠체어에서 찰스를 침대로 옮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건 데이빗의 일과 중 하나였다. 마른 잠옷을 개어 침대에 올려두면 상의는 찰스가 직접 입었고 하의는 데이빗이 입는 걸 도와주었다. 데이빗은 낯빛 하나 붉히지 않고 그 모든 일을 해냈다. 얼굴 근육이 경직된 것뿐이지 실은 시커먼 속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찰스는 내심 데이빗이 그랬으면 했다. 그것은 바람일 뿐, 찰스는 데이빗의 속마음을 영영 모를 터였다.


"난 싸이킥이야."

"정신능력자 말씀이십니까?"

"타인의 생각을 원하는 대로 읽을 수 있지. 난 그게 언제나 축복받은 능력이라 생각했어."

"저는 사람의 말과 표정을 분석해 다음에 할 말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저도 타인의 생각을 읽은 것인가요?"

"그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니야."


데이빗은 찰스의 옷을 옷장에 걸어두고 자신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데이빗은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찰스에게서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찰스는 옆으로 누운 데이빗을 안았다. 데이빗의 몸은 차가웠다.

네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내가 에릭을 이렇게 안고 있으면 그가 꾸는 꿈들을 볼 수 있었는데. 데이빗의 마른 등에 대고 찰스가 중얼거렸다.



찰스가 잠들기 전까지 데이빗은 베갯머리에서 자신이 가본 행성과 거기서 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저장된 미래의 논문들을 보여주기도 했고 찰스가 유독 피곤해하는 날에는 그의 가슴팍을 두들기며 자장가를 부르듯 책을 읽어주었다. 찰스는 데이빗이 하는 이야기들에 흥미를 보였다. 때론 그들의 대화는 깊은 밤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ㅡ그곳의 식물들은 최소 2M가 넘는데, 그것들을 베어내며 이동하느라 하루에 1km 이상을 움직일 수 없었죠."


그 작전은 완전히 실패였어요. 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정말이야? 믿을 수 없어. 정말이에요. 거대한 갈대 사이에서 우린 불도 피울 수 없었어요.


"난 네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알 수 없어."

"이 상황에서 당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 허풍을 떨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빗이 빙그레 웃자 찰스도 따라 웃었다. 찰스는 어느 순간부터 데이빗에게서 에릭의 모습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너는 에릭의 대용품이 아니야. 데이빗의 머리칼은 다시 금색으로 돌아왔다. 다리를 꼬고 홍차를 마시던 행동도 에릭의 억양을 흉내 내는 것도 그만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찰스의 체스 상대가 되어주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를 본 적 있어?"


데이빗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입을 떼었다. 그들은 매우 잔혹하고, 포악합니다. 그것이 다였다. 데이빗은 그것에 대해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웨이랜드가 태어난다면 너는 그에게로 돌아가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원치 않아도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으니까."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나요?"

"어느 정도는 동의해."

"저는 그가 어머니 안에서 영면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찰스는 운명을 바꿨던 미래의 자신과 바꿀 수 있었던 매 순간을 기억했다. 찰스는 미래의 찰스를 통해 자신의 앞날을 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삶은, 어떤 길을 선택을 해나가든 간에 바뀌지 않을 커다란 물줄기를 따라가는 여정과도 같았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바꿔야 할 이유와 답을 먼저 찾을 것입니다."

"네가 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해?"


…모르겠습니다. 데이빗은 자주 하지 않는 대답을 내놓곤 조금 웃었다.


"우주에 가고 싶어. 날 데려가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데이빗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널 어떻게 미워하겠어. 찰스는 데이빗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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