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크에릭] 열한 번째 손가락| # X-men 2017. 2. 7. 23:57
AU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꽃집은 일 년여 전부터 카페를 겸하고 있었다. 행크는 카페가 생긴 이래로 가게를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었으나 모순적이게도 카페가 생기기 전의 꽃집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그 가게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식물도, 맛있는 쿠키나 차도 아닌 애매한 위치 덕이었다. 그가 일하고 있는 학교 근처에 있었지만 학교 앞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번화가에서는 두 블록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매한 위치는 부러 찾아오는 이가 아니면 손님이 거의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해서 조용한 공간에서 잔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행크는 어깨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는 긴 생머리의 십 대 여자아이가 이어폰을 끼고 노트에 무언가를 바쁘게 끄적이고 있었다. 그가 카운터를 살짝 소리 나도록 두들기니 화들짝 놀라 이어폰을 귀에서 뺀다. 니나는 들어온 사람이 단골인 행크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행크는 왠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가장 안쪽의 아늑한 소파 자리에 앉았다.
"행크. 잘 지냈어요? 여전히 일은 많아 보이네요."
니나는 행크가 짊어지고 온 자료와 두꺼운 책들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행크는 그녀가 건넨 진한 커피를 받아들었다. 굳이 주문하지 않아도 니나는 그가 뭘 마시려는지 다 알았다.
"교수님이 이걸 휴일 전까지 마치길 원하셔서요. 아무래도 밤샘해야 할 것 같아요."
"휴, 우리 아빠가 행크 일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데요."
"시험 얼마 안 남았죠?"
행크는 금세 니나의 고민을 알아차렸다. 니나는 트레이를 내려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그녀는 입시에 대한 부담이 큰 듯했다. 원하는 학교에 갈만한 성적에 미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애초에 진학에 큰 뜻이 없는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졸업 후에 가게의 주인인 아버지-에릭-를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가게를 꾸려나가길 원하는 듯했는데, 정작 에릭은 어림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년이요. 아빠는 제가 그 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 가게라도 팔 수 있대요. 물론 가게를 팔아야 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요."
"으하하, 부모님들 기대가 다 그렇죠."
"아빠는 이제 절 객관적으로 봐야 해요. 전 여기서 일하는 게 더 좋아요."
"좋아하던 것도 일이 되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더 일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행크 말이 맞아요. 사실 저는 제가 아빠가 하는 일들의 반의반도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니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덤덤한 어조였지만 올라갔다 내려온 어깨가 유독 쳐져 보였다. 가게에는 에릭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꽃과 음식들은 물론, 세세한 인테리어 장식들도 모두 그의 솜씨였다. 니나가 가게를 봐주는 동안에도 에릭은 가게에 딸린 작업실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아빠의 능력은 특별하니까요. 니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손재주를 물려받진 못한 것 같다며 순순히 털어놓았다. 행크는 페인트 붓 자국이 남은 벽을 보며 그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궁금증은 얼마 못 가서 해소되었는데, 방학을 마친 니나가 학교로 돌아가면서 그의 아버지가 다시 자리를 메웠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중년의 사내는 꽤 낯이 익었다. 아주 처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행크는 기억을 되짚어 어디서 그를 보았는지 곰곰이 떠올려보려 했다. 아! 그리고 기억이 났다. 가끔 가게 앞에서 행크에게 눈인사를 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붉은색 수염을 기른 에릭은 놀랍게도 니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니나가 말하는 에릭은 가정에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늦게까지 가게를 영업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니나와 저녁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고, 휴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니나는 아주 어릴 적엔 유럽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그녀를 위해 터전을 두고 이민을 감행하기도 했단다. 니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매일 비슷한 셔츠를 입고 대충 빗어낸 곱슬머리를 하고선 볼 때마다 꽃을 다듬고 있었다. 평소에 작업실에서 하던 걸 카운터로 가지고 나온 듯했다. 행크는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다가 그가 일하는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가끔은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에릭이 돌아보는 적도 있었다. 니나는 그가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오고 나갈 때의 짤막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는 거의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
"방에 두려고 하는데 추천해주실만한 꽃이 있나요?"
줄기에 난 잎을 자르던 에릭은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사내에 놀란 모습이었다. 행크는 자신이 이곳의 단골쯤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릭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에릭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행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느라 내용은 조금도 귀담을 수 없었다. 가게를 나온 행크의 손에는 말려서 오래 보관할 수도 있다는 수국과 흐드러진 안개 같은 블루미스트가 쥐어져 있었다. 그날 밤 행크는 방문에 거꾸로 매단 수국을 보며 잠에 빠져들었다.
에릭은 가시를 다듬고 있었다. 행크는 그런 에릭을 물끄러미 보다 무심코 깨달았다. 에릭과 자신은 연인이었다. '에릭과 내가 연인이라고?' 그들은 연인이 맞았다. 그가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하자 에릭이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요.' 행크가 에릭을 가까이 불렀다. 에릭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얼굴을 말끔하게 면도하고 깨끗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행크는 에릭의 동그란 머리를 안았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희미한 향기가 났다. 아니다, 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냄새를 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왜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걸까, 이것은 꿈이기 때문에.
행크는 꿈이라는 걸 자각하자마자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어났다. "아, 젠장." 욕이 절로 나왔다. 아래가 축축했다. 행크, 넌 너무 금욕적이야.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말하곤 했다. 금욕적 생활의 말로가 이렇다. 잠옷과 속옷, 시트까지 세탁기에 모조리 쑤셔 넣고 돌아와 눕는데 쉽게 잠이 올 리가 없다. 그는 결국 뜬 눈으로 남은 밤을 꼴딱 지새우고 출근했다. 종일 책상 앞에서 졸다가 샘플을 엎고, 엉뚱한 곳에 전화를 돌리고, 잘못된 파일을 교수에게 가져가 기어이 야단을 맞고 돌아왔을 때 행크는 몸 전체에 오한이 들었다. 감기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
행크는 감기 기운이 사라진 후에야 다시 카페를 찾았다. 닷새만이었다. 에릭은 붉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수염은 못 본 새에 더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꽃들은 한 단씩 매여 에릭의 손에 포장되고 전국으로 배달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릭은 가게 안으로 들어온 행크를 보자마자 포장지를 놓고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은 티를 추천받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닷새나 지났음에도,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았나 보다. 행크는 어째서 에릭 앞에만 서면 열 살짜리 꼬마보다도 더 어리바리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그에게서 잔을 건네받다가 손이 미끄러지면서 에릭에게 뜨거운 커피를 일부 쏟아버린 것이다. 에릭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손을 움켜쥐고 싱크대로 돌아 찬물을 그 위로 쏟아냈고, 행크는 허겁지겁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해요. 봐요, 많이 데었어요?"
에릭은 행크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여기는 왜 들어오냐는 눈빛이었다.
"괜찮으니까 가요."
"이거 지금 생긴 상처 아니죠?"
행크의 눈에 들어온 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손보다 손등에 난 자잘한 흉터들이었다. 오븐에 데이고 가시에 베인 상처들이 제때 아물지 못하고 방치되어 남은 흔적들이었다. 에릭은 행크가 흉터를 보고 있는 게 민망했는지 다른 손으로 손등을 슬쩍 가렸다.
"일하면서 이 정도는 생겨요. 별거 아니에요."
에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보인 등을 다시는 감추지 않았다. 완강한 거부의 의사에 그는 그대로 카운터에서 나와야 했다. 행크가 나간 걸 보고서야 에릭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손을 살폈다. 행크는 마치 자신이 데인 것처럼 가슴이 홧홧했다.
다음 날 아침, 행크는 가게에 들렀다. 가게는 일찍부터 문이 열려있었다. 에릭은 걸레로 바닥을 닦다가 행크를 보고는 굽힌 허리를 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감겨있었다. 행크는 작은 상자 두 개를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화상 연고고 이건 흉터를 없애주는 연고예요."
"……."
"제가 이런 거 만드는 일 하거든요. …그럼 가볼게요."
에릭은 걸레 자루를 벽에 세우고 팔짱을 꼈다. 사과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행크는 이렇게라도 짐을 내려두고 싶었다. 그가 뒤돌아 떠나려고 할 때 문득 에릭이 물었다.
"당신이 행크인가요?"
**
연구실의 동료들은 아침부터 커다란 목소리로 인사하는 행크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 내내 시든 꽃처럼 말라 있다가 갑자기 만개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혹여 어디라도 아픈 게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행크의 옆자리에 앉은 레이븐만이 눈치를 채고서,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진전이 있나 보구나? 행크는 레이븐을 가까이 불렀다. 레이븐은 흥미로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내 이름을 물어봤어.
"그래, 엄청난 진전이구나. 이제 이름으로 부르겠네?"
행크는 뿌듯한 얼굴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저녁엔 카페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엔 물론, 언제나처럼 에릭이 있었다. 눈인사를하니 고개를 아래로 끄덕여 답을 해주었다. 내심 연고에 관해 이야기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커피를 밀어 주면서도 묵묵부답이었다.
오늘만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자꾸 그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이번엔 그가 행크를 흘끔흘끔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릭은 평소와는 달리 꽃을 다듬거나 포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낡은 스툴에 앉아서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행크가 하는 일을 보다가, 행크가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들면 보지 않은 척 딴청을 했다. 하지만 끝내 말을 걸러 오지는 않았다. 행크는 찜찜한 기분으로 카페를 나서려 했다.
"행크?"
에릭이 그를 불러세웠다. 행크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뒤를 돌았다. 그런데,
"앞으로 여기 오지 않았으면 해요."
"네?"
처음엔 그의 말이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믿을 수 없어 왜? 보다도 다시 말해달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행크는 도리도리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의 태도에 에릭은 어쩐지 화가 난 모습이었다. 행크는 찰나 동안에 답을 찾으려 가능성을 되짚었다. 연고가 이상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절로 그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반창고가 발라져 있었다.
"그 애는…"
하……. 에릭은 긴 한숨을 쉬었다. 행크는 여전히 에릭이 왜 화를 내는지 '그 애'가 누군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열 일곱 살이야. 이봐, 경찰에는 알리지 않을 테니 그냥 조용히 사라져요."
"에? 그게 무슨…."
"내 딸에게 털끝 하나라도 손대면, 이건 경고입니다.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잠시만요. 뭔가 오해가…"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줬으면 해요."
"제가 관심 있는 건 니나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뚝. 가게 안에 정적이 흘렀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
"어….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손님 하나가 트레이를 반납하면서 행크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행크는 그가 화이팅이라고 입 모양을 내는 걸 애써 못 본 체했다.
"이따 올까요?"
행크는 뒤통수를 머쓱하게 만지며 말했다. 폐점 시간까지는 두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에릭이 그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반듯한 글씨로 적힌 입간판 옆에 서서 행크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맙소사, 에릭은 자신이 니나에게 집적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니나에게 물어봤으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태까지 그에게 보인 호의가 딸의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는 수작처럼 보이기라도 말인가. 행크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그에게 정식으로 고백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방금보다 훨씬 멍청하게 고백하는 자신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고 곧 울적해졌다. 마치 남은 두 시간이 마지막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유예된 시간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찼다. 올해 겨울은 유독 춥다고 했다. 불길한 예감에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아마도 그쯤이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옆에서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너 바보야?"
행크는 몸을 덜덜 떨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에릭이었다.
"들어와서 기다려."
에릭은 문을 열어놓고 들어갔다. 행크는 고집부릴 일이 아닌 걸 알았다. 결국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체감상 반나절은 밖에 서 있었던 것 같았는데 겨우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에릭은 그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주었다. 행크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에릭은 형식적인 미소를 한 번 짓고는 가버렸다. 행크는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얼어있는 손을 덜덜 떨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쥐었다. 몸이 단번에 녹아내렸다.
폐점 시간이 가까워져 오며 행크는 또다시 긴장으로 가슴이 두 방망이 치기 시작했다. 영업시간이 남았음에도,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마자 에릭은 문에 클로즈 팻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를 불러 차에 태웠다. 에릭은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서 운전을 했다. 행크는 번화가를 벗어날 때만 해도 머리엔 고백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는데, 외곽으로 벗어나기 시작하자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들에 산 채로 매장이라도 하려는 걸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는 동안 차는 어떤 집 앞에 멈춰섰다. 행크는 이곳이 에릭의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행크! 오랜만이에요."
거실에 있던 니나가 현관 앞의 행크를 발견하고선 반갑게 맞았다. 에릭은 행크가 니나와 이야기하는 동안 저녁 식사를 만들어왔다. 식사 초대라니. 암매장에서 벗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시점에 벌써 몸은 꾸르륵 소리를 내며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행크는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의무적으로 스푼질을 하면서도, 그것들은 하나같이 눈물 나게 맛있다는 객관적 사실에 굴복했다. 그와 함께 괜한 걱정이 들고 마는 것이다. 혹시 자고 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고백했다고!
행크가 헛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지 말든지 에릭은 정해진 순서처럼 식사를 마치는 대로 디저트를 가지고 왔다. 졸인 오렌지와 설탕 과자를 얹은 타르트였다. 한 눈으로 봐도 군침이 돌았지만 배가 가득 차서 더 먹을 수 없다고 사양하니, 니나가 이건 배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꼭 먹어보라며 성화였다. 행크는 포크로 타르트의 귀퉁이를 조금 잘라 맛보다가 순식간에 반 이상을 먹어 치웠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거 봐, 다 맛있다고 한다니까? 가게에서 팔면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렇죠 행크?"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팔긴 힘들 거야."
"내가 반죽을 하면 어때?"
니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에 에릭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했다.
"안 돼. 지금도 안 되고, 졸업하고도 안 돼."
"비법은 이렇게 사라지겠네요."
"네가 가끔 가게 봐주는 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에릭은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음료를 가지러 자리를 뜬 사이 니나가 행크에게 속삭였다. 봤죠?
행크는 마지막으로 에릭이 내온 따뜻한 코코아까지 전부 비우고 터질 것 같은 위장을 부여잡으며 슬슬 가봐야겠다고 운을 띄웠다. 그리고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걱정과는 다르게 에릭은 그를 잡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잘 가, 행크."
"잘 가, 행크."
나무문이 쾅 닫히고 행크는 잠깐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게다가 정작 해야 할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회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의 딸이 보는 앞에서 에릭에게 고백하느니 망설임 없이 스튜에 고개를 처박는 쪽을 택할 터였다.) 후회도 잠시, 곧 어떻게 집에 갈 지 막막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는 지명의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집이나 학교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뒤지고 있는 사이에 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에릭이 두툼한 점퍼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가자. 태워다 줄게."
"……."
행크는 그를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에릭은 손을 한 번 비비고는 히터를 틀었다.
"얘기 길어지면 니나 저녁을 못 챙겨주니까."
그래서 절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군요. 행크는 갑작스러운 식사초대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고백할 기회는 또 한 번 찾아온 셈이었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하지만, 니나는 친구고요. 저는…."
"했던 얘기를 왜 또 해?"
"에? 그럼 절 여기까지 왜 데리고 오신 거예요?"
행크는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의도보다 모난 어조였는지 에릭이 어리둥절해 했다.
"데리고 오고 싶어서. 뭐 다른 거 생각했어?"
"네? 아…. 아, 아뇨?"
"원한다면 자고 갈래?"
"아뇨.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해서요. 급히 마무리 지어야 할 보고서도 있고…."
"거절만 하네. 나는 한 번에 오케이 했는데."
"아뇨. 아니, 아니라고 하려던 게 진짜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에릭은 그의 변명하는 모습이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행크는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의외로 장난도 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너무 짓궂으시네요."
"아주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어. 늦었잖아."
에릭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행크는 눈 아래를 느리게 덮었다가 떨어지는 속눈썹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전 아직 준비가……."
"무슨 준비? 빈 소파에서 잘 때도 준비가 필요해?"
"아……."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행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가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자 에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행크는 빨개진 얼굴로 그와 함께 웃었다.
"미안. 반응이 귀여워서 자꾸 놀리고 싶어지네."
에릭은 히터 온도를 낮추었다. 그리고 내비게이터를 가리키며 그에게 집 주소를 입력하라 말했다.
"아내가 떠난 지 15년쯤 됐어. 그때 니나는 겨우 두 살이어서 아마 기억 못 하겠지만, 아내가 떠난 후로 난 거기에 남을 자신이 없었어."
그들은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 치 앞만 보이는 어두운 도로를 달리면서 에릭은 문득 입을 뗐다.
그는 미국에 오기 전에는 폴란드에서 살았다고 했다. 폴란드에서는 꽃과 과자와는 전혀 관련없는, 건축사무소에 다니는 평범한 노동자였고, 그 회사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녀에게는 8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15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진지한 관계는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가능한지 모르겠어."
어느덧 에릭의 자동차는 행크가 입력한 주소에 도달했다. 시내의 작은 맨션이었다. 행크는 내리지 않았다. 에릭은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졸음운전을 하던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이십 미터 아래 절벽으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뒷좌석에 있는 베이비 시트를 지키기 위해 핸들을 꺾은 결과, 아기와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세 가족이 교외로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에릭은 니나에게 늘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라고 했다. 세 살이 된 니나를 안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냥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해둬야 할 것 같았어."
행크는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저 흉터투성이인 그의 손을 꼭 잡아주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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