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반려 1 # 未生 2014. 12. 29. 22:19

반려

해준백기 




1.


철강 1팀의 첫 번째 회식은 무리 없이 마무리되어가는 듯했다. 지금의 5인 체제가 된 지 1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간 저녁 회식은 한 차례도 갖지 못했던 터였다. 그것은 개인주의가 강했던 팀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팀장인 차 과장의 사정 때문이었다. 과장은 몇 년 전 정기검진 결과를 받은 후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신입인 장백기가 입사를 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저녁보다는 점심 회식이 주가 되었고 퇴근 후 사수와 잔을 부딪치는 일은 철강팀에선 마치 다른 나라의 것과 같이 되었다. 장백기가 입사 초반에 팀에 적응하지 못할 때 유독 상사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한 것에 못내 힘들어했던 이유도 그랬다. 


과장은 고깃집을 나서면서 일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하며, 대신 남은 사람들끼리라도 2차를 가라고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강해준은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했으나 상사의 호의를 끝까지 거부하진 못했다. 과장이 돌아가고 난 뒤, 팀의 홍일점인 신다인은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결과적으론 남자 셋이 남았다. 쌀쌀한 밤공기를 맞으며 세 사람은 한적한 종로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이렇게 가긴 아쉬운데 저희끼리라도 2차 갈까요. 주신 카드도 있구요.” 



해준은 그러자고 했고 장백기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결국 세 남자는 홍 대리가 잘 안다는 소주집에 가기로 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가게 내부는 만석에 가까워 가까스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앉기 전 걸려온 전화에 홍 대리가 밖으로 나갔다. 백기는 두툼한 메뉴판을 맞은편의 해준에게 주고 자신은 벽에 걸린 메뉴를 천천히 살폈다. 



“이거 어떡하죠.”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온 홍 대리가 난처하게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내 전화인데 애기가 열이 있어서 병원에 갔다고 하네요.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작년에 새신랑이 된 홍승휘 대리는 지난여름에 건강한 아들을 얻었다. 작년엔 결혼 준비로 내내 정신이 없어 보이더니 어째 그때보다도 근래 더 바빠보인다. 백기는 그를 볼 때마다 결혼이라는 것이 상상했던 것처럼 마냥 분홍빛 꿈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20대 중반을 갓 넘어선 나이에 결혼이란 마냥 아득한 환상과도 같았지만 그는 이미 어머니 주선으로 선도 몇 번 보았다. 백기는 그에게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라고 하는 해준을 보았다. 홍 대리보다 한 기수 선임인 그는 미혼이다. 홍 대리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급히 문을 나섰다.


그리하여 남겨진 해준과 백기는 말없이 메뉴판을 읽었다. 해준이 먹고 싶은 게 따로 있냐고 묻자 백기는 가리는 것은 없고 맥주만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모둠 튀김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대화만이 오갔다. 어째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온몸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건 백기뿐인 듯했다. 해준은 사석에서조차 수다스럽지 않았다. 대화라고 하기 무색하게 백기가 내내 조잘거렸고 해준은 안주를 집어 먹으며 그의 말에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엔 선배가 소개시켜준 여자를 만났는데, 만났을 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거든요.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했구요. 그런데 꼭 다음 날 연락을 하면 미안하다는 답장이 옵니다.”


“대리님은 어떠십니까? 대리님은 선 자리가 끊이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솔직히 원인터 다닌다고 하면 여자 소개해준다는 사람이 줄을 잇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리님은 매너도 좋으실 것 같고, 얼굴도… 잘생기셨고……. 


눈이 높으신 건지……. 



“저는 남자 좋아합니다.”

“네?”



백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깃집에서 한 병, 아까 치운 게 한 병 그러면 이게 세 병째던가. 지각이 말랑말랑해져 멋대로 모양을 만들 때가 온 모양이었다. 백기는 해준이 해명과도 같은 코멘트를 덧붙여주길 바라며 그의 옆선을 애타게 보았지만, 제 선임은 낮에도 밤에도 두 번 말하는 법이 없었다. ‘튀김 맛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튀긴 것보다 구운 것을 좋아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기호를 말하듯 남자의 태연함은 꾸밈없이 정직했다. 해준은 제가 잘못 들었길 바라는 후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제 잔에 소주를 따랐다. 쥔 병을 빼앗아서라도 자작을 하지 못하게 하던 후임은 놀람이 쉬이 가시지 않는지 입만 어버버해서 그를 쳐다만 보았다. 


백기는 정말로 놀랐다. 놀라서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가 굳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장백기. 머리 좀 굴려 봐. 대리님이 무안하시지 않도록, 어색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해보라고!

 


“대리님은 어… 취향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리고 나온 물음이 이거였다. 취향은 이미 말했잖아 바보야! 아니 그러니까 이상형 같은 거……. 제 선임이 콩떡 같은 제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길 바라며 백기는 그렇게 물어놓고도 괜스레 틀어막고 싶어진 입에 튀긴 닭똥집을 재빨리 넣었다. 



“……열정적이기보다 무언가에 열중해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자신만을 바라보길 원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닙니다. 굳이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 일과 커리어에 집중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좋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백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 선임은 언어에 담긴 의중을 생각보다도 더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뜬구름 같은 해준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그가 말한 취향에 단박에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부합하는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면 강해준 본인이려나. 해준이 애매하게 남은 맥주를 백기의 빈 잔에 전부 부었다. 백기는 두 손으로 잔을 들고 연신 어깨를 움츠리며 술을 받았다. 




백기의 주량은 맥주 두 병을 넘지 못했다. 술도 자주 마시면 는다는 말에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낀 적도 있었지만 귀갓길엔 언제나 만취 상태였다. 술을 못하는 건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는 약주 한 잔, 어머니를 비롯한 외가는 아예 술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말술이 필수 소셜스킬인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게다가 차 과장은 술을 권하지도 않았다- 백기는 술을 잘 마시고 싶었다. 낮에는 업무 능력으로 밤에는 분위기까지 잘 맞추는 예쁜 부사수로,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그 점에선 강해준 대리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백기야, 술을 못하면 아예 마시지 않는 방법도 있어.’ 문득 대학 때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그때 그 선배는 왜 그런 말을 했었지. 아, 아마도 술에 취해 반쯤 정신을 놓고 길거리에서 해롱거렸을 때였지.




“저는 어떻습니까. 남자 눈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서요.”



매력적인 사람일까요? 그렇게 말을 하고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장백기 씨.”



묘하게 가라앉은 해준의 어조에 백기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지금 절 떠보는 겁니까?”

“…….”




‘술 마시는 거, 기분 좋은 거, 다 이해하고 좋은데,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선배의 말이 이명이 되어 귓가를 떠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남자가 잠재적 연애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공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는 매사 조심해야 하죠. 상대가 착각이라도 한다면 곤란하거든요.”

“…….”

“원치 않는 착각은 상대에게 상당한 실례가 됩니다.”

“죄송합니다. 그,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내가 그걸 왜 물어봤지.’ 



하여간에 이 알콜이 문제다. 장백기는 이미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릿속에서 적절한 대답을 꺼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냥 그 자리에서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해준은 잔을 한 번 더 비웠다. 백기는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만 노려보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장백기 씨는.”



먼저 침묵을 깬 건 그였다. 백기의 아랫입술이 절로 깨물렸다. 



“그 정도면 훌륭합니다.”

“예, ……예?”

“보는 눈은 남녀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취향을 가졌다고 해서 대단하거나 특별한 취향을 갖게 되는 건 아닙니다. 보통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 남자에게도 많습니다.” 



또 어떤 힐난이 쏟아질까 긴장하던 백기에게 돌아온 건 의외의 것이었다. 



‘훌륭, 훌륭하다고.'


그것은 분명 칭찬이었다.



“아하하……. 인기라뇨. 번번이 실패만 하는 걸요…….”

“장백기 씨도 곧 좋은 인연 만날 겁니다.” 



한껏 누그러진 분위기에 백기는 안도하고 사수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입구를 타고 나오는 맑은 액체는 물흐르듯 투명한 잔을 채웠다. 졸졸 따라진 술처럼 두 사람의 시간 또한 잔잔하게 흘렀다. 해준과 백기는 남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연애사를 풀어냈다. 해준은 직접적인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백기의 고민에 연장자로서 성실히 조언해주었다. 자정이 되기 전, 해준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는 것으로 자리는 파했다. 



“슬슬 일어나죠.” 


회식 때문에 차를 두고 온 해준은 지하철을 타려는지 백기와 함께 큰길로 나섰다. 



“저는 저쪽에서 버스 타고 가겠습니다.”



백기 또한 지하철을 타도 됐지만 밝은 곳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해준은 소주 두 병을 그 자리에서 전부 마신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아주 멀쩡했다. 그에 반해 자신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붉게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그래요. 내일 봅시다.”

“들어가십쇼.”



백기가 해준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인 해준이 곧은 자세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백기는 그가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 버스 정류장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달아오른 얼굴에 마주하는 바람이 유독 차게 느껴졌다. 백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해준은 이미 프레임 밖에서 사라진 후였다. 





**






 「차 과장님께서 점심같이 하자고 하시네요. △△해장국 집입니다. 50분까지 로비로 내려와요.」 



뜻하지 않은 배려에 백기는 난처해졌다. 오전부터 메슥거리는 속에 점심을 거를 생각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과장의 호출이다. 지각을 해 혼이 난 이력이 있는지라 몸이 안 좋다고 빠졌다가는 자기관리를 못 하는 사람으로 영영 낙인이 찍힐지도 몰랐다. 백기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나와 있는 뚝배기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설상가상으로, 백기는 선지를 먹지 못했다. 뭉쳐있는 붉은 덩어리를 보자 결국 토기가 불쑥 올라온다.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뜬 백기는 들어서자마자 변기를 부여잡았다. 나오는 건 헛구역질뿐이어서 떨리는 손가락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엊저녁 먹은 것들이 전부 쏟아져 나온다. 입을 닦는 세면대 앞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해준이 돌아온 백기를 흘끔 곁눈질했다. 백기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는 눈치를 보며 맨밥만 깨작이다 그릇을 반도 비우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리님. 오전에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파일은 메일로 보내놨습니다.”

“고마워요.” 



몸을 돌려 자리로 가려는 순간 백기는 해준에 의해 손이 붙들렸다. 



“장백기 씨 몸이 안 좋습니까?”



손을 잡힌 백기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얼음이 되었다.



“손이 차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살을 꾹 누르니 백기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

“체기가 있는 것 같네요. 의무실 가세요.”




**




백기는 손에 쥐고 있던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감기 기운이 있던 차에 불편한 자리에서 술까지 마셨으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직원들에겐 흔한 증상인지 의무실에서는 그의 안색만 보고도 약을 내주었다. 상태는 오히려 구토한 후 더 악화되었다. 약을 먹었으니 괜찮아지겠지……. 퇴근하기까지는 두어 시간 가량 남았다. 괜찮아지길 바랄 뿐이었다. 


탕비실에 들어온 석율이 손을 까딱이며 백기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디 갔다 와? 자리에 없던데.”

“잠깐… 바람 좀요.”

“커피 마실래? 왜 커피 마시러 온 거 아니야?”

“됐습니다.”



믹스 커피를 눈앞에서 흔드는 석율을 향해 고개를 젓고선 백기는 빈 컵에 찬물과 뜨거운 물을 번갈아 부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의 분위기에 옆으로 안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백기는 그런 그를 모른척했다. 백기는 종종 그가 자신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길 내심 바란다는 걸 알았다. 사실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석율이었지만 -비단 자신뿐일까 싶지만- 절친한 여고생처럼 세심하게 파고드는 건 피곤했다. 지금은 좋은 시점 또한 아니다. 지금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안 갑니까?”

“말 안 해도 갈 거거든요. 장-백기 씨-”



인상 좀 피세요. 눈썹 사이를 꾹 누르고, 석율은 백기가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석율이 떠난 탕비실에서 백기는 멍하니 이마를 문질렀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해준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백기는 빈자리를 천천히 훑어보다 이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노트북 뚜껑을 열었다. 당장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뭐라도 손에 잡아야 했다. 의미 없이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다가, 주간 업무 보고서를 열었다. 반쯤 채워진 양식에 자신이 적어야 할 내용을 한 줄씩 채웠다. 모레까지 해도 충분한 일이었으나 닥쳐서 무언가를 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해준도 같았다. 자신이 먼저 해서 넘겨야 사수도 검토할 시간이 넉넉할 것이다. 백기가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을 때 지잉 책상이 울렸다. 석율의 문자였다. 



 「ㄷㅂ?」

 「지금은 안 됩니다.」

 「변했어. 배신자.」



뭐가 배신자라는 겁니까?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엄지로 두다다 글씨를 만들어내다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덮었다. 약을 먹으니 요동치던 속은 가라앉았는데 졸음과 두통이 밀려온다. 책상 위로 진동이 몇 번 더 울렸다. 백기가 답장을 안 하니 석율이 메시지를 폭탄으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이 두통은 필히 8할이 한석율 때문일 것이다. 안경 아래로 곧은 눈썹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백기 씨, 의무실 안 갔습니까?”



갑자기 나타난 해준에 백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뇨 다녀왔습니다.”



해준은 들고 온 서류를 옆에 두고 곧장 모니터에 정신을 집중했다. 타닥타닥. 그리고 키가 눌리는 소리뿐이었다. 백기는 해준의 모니터를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이 계속 서 있었음을 자각하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뭐라고 합니까?”

“에? 예……. 아…, 그……. 체한 것 같다고……. 약 처방 받아왔습니다.”



해준은 다시 말이 없었다. 백기는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제 사수가 대답하길 마냥 기다리다가, 그가 미동도 없자 입을 일자로 한 번 만들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업무 마무리됐으면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멍하니 파일을 들여다보던 백기는 해준의 말에 옆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다. 


“……네.”





**





“대리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몸조리 잘해요.”



할 일이 꽤 많아 보이는 사수를 두고 일찍 퇴근하는 마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하지만 해준은 끝내 남은 업무를 백기에게 넘기지 않았고 백기로서는 달리 그것을 억지로 달라고 조를 이유도 없었다. 흔치 않게 찾아오는 사수의 호의는 즐기기로 했다. 해준은 창백한 백기의 얼굴을 훑어본 뒤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백기는 애꿎은 가방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다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표정없는 얼굴이 다시 백기를 본다. 백기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해준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보겠습니다.” 백기는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온 백기는 문득 사무실로 고개를 돌렸다. 파티션 너머로 반쯤 보이는 사수는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백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딩딩- 경쾌한 알림과 함께 문이 열렸다. 백기는 어쩐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어내고 엘리베이터 몸을 실었다.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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