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반려 2 # 未生 2014. 12. 30. 19:27


2.


해준은 꽤 오랜 시간 차 과장과 대화를 나눴다. 백기가 얼핏 듣기로 대부분은 출장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출장, 특히 해외출장이 잦은 철강부에서 과장급 이상은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틈이 없었다. 실제로 차 과장 또한 일주일 만에 회사에 얼굴을 보였는데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에 진행된 업무를 보고하는 건 강해준의 몫이었다.    



“이번 세미나에 장백기 씨도 동행시키겠습니다.” 

“어, 그래. 그렇게 해. 장백기. 이번 세미나 강 대리랑 다녀와. 출장 올리고.”

“네.”



이름이 들린 순간부터 쫑긋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백기는 차 과장의 부름에 곧장 반응했다. 앉아있는 과장과 서 있는 해준의 눈이 백기를 향해 있었다. 알겠습니다. 백기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다시 업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차로 가죠.”



보고를 끝낸 해준이 자리로 돌아왔다. ‘교통편 : 자차이용’ 백기는 결재가 떨어진 해준의 출장 기안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지하철이 닿지 않는 곳이라, 마침 자신은 어떻게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해준의 동승 제안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백기는 빈칸을 사수의 것과 똑같이 채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데리러 갈게요. 어디에서 가까워요?” 

“아, 아닙니다. 제가 대리님 댁 근처로 가면…….” 

“가는 길이니까 픽업하면 돼요. 낙성대 쪽이죠?”

“네…….”

“그럼 역으로 와요.”



일사천리였다. 예정에 없던 장백기의 세미나 동행 건은 말이 나온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곁에서 매번 보는 모습인데도 새삼 감탄하게 되는 사수의 일 처리다. 말을 마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해준은 자리를 떴고 백기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기웃거렸다. 얼떨결에 해준의 차를 타고 출장을 가게 되었다. 과연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 건지 쉽게 판단이 서지는 않는다. 차로 약 세 시간, 왕복 여섯 시간. 멀지 않지만 결코 가깝지도 않은 거리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출장은 확정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출장 신청서의 상신 버튼을 누른 백기가 기지개를 죽 켰다. 커피나 한 잔 마실까. 


휴게실에는 마치 약속된 것처럼 석율과 영이가 있었다.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안영이는 그렇다 쳐도 한석율은 대체……. 석율이 백기를 발견하고는 쥐고 있던 컵을 위로 들어 보였다. 백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 커피머신 앞에 섰다. 등 뒤로 석율과 영이는 백기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마도 내일 예정이었던 동기 모임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참, 동기모임.



“아, 저는 출장 때문에 빠져야 될 것 같습니다.”

“웬 출장? 그런 말 없었잖아. 시간 된대매.”

“오늘 아침에 급하게 잡혔습니다. 미안해요. 저는 다음에 갈게요.”

“혼자 가요?”

“아뇨. 원래는 강 대리님 혼자 가시는 세미나인데 같이 가자고 하셔서….” 



백기의 대답에 석율과 영이가 동시에 오- 하고 입 모양을 냈다. 

  


“백기 씨 이제 인정받는 것 같네요.”

“그런 건 아닙니다. 딱히 서포트하러 가는 것도 아니라….”

“들이받은 후로 달라졌지? 거봐 내가 뭐랬어. 선빵이 중요한 거라고.”

“한석율 씨 제가 언제 들이받았…”



석율은 백기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백기는 본능적으로 이곳저곳 찔릴까 경계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백기 씨. 마치 그가 지방 발령이라도 받은 듯 표정을 퍽 안쓰럽게 지어 백기도 받아칠 말을 잊었다.  



“사수와의 출장. 하아…. 우리 사이코패스랑 단둘이 출장 간다고 생각만 해도 으윽- 노 땡큐야. 사무실에 둘이 있는 거랑은 천지 차이라고. 혹여나 심심하실까 끊임없이 말 붙여야 되고 비서라도 된 것마냥 이거 들고 저거 들고 새끼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녀야 되지, 차라리 일하는 중이라면 참을만하지. 근데 갈 때도 같이 간다고 생각해봐.” 

“왜… 같이 가면 안 됩니까?”

“가는 내내 말동무 해야 될 거 아냐. 밀-폐-된 공간에서. 도망칠 구멍도 없어. 절대 같이 가면 안 되지. 네버. 설마 같이 가는 건 아니지, 신경 쓴답시고 같이 가자고 말 꺼내지 마.”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는다는 듯이 석율은 어깨부터 머리까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는 듯싶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위잉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 뜬 성준식 대리의 번호를 가리키며 석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양반은 못 돼? 응? 검지로 통화버튼을 가볍게 누른 석율이 전화기를 귀에 대며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같이 가는 거,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네?”

“한석율 씨 말처럼 강 대리님이 백기 씨 옆에 두고 하인처럼 부릴 스타일도 아니시구요.”

“아……. 네, 그렇죠.” 

“잘 다녀와요.”



영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휴게실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백기는 벽에 등을 기대고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였다. 해준과 영이, 석율의 말이 뒤섞여 백기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조금은 걱정이 된다.






**






백기는 차를 대기 편한 출구에 나와 손을 비볐다. 날씨가 어느새 많이 쌀쌀해져 있었다. 나온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손끝부터 귀 끝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장갑을 끼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백기는 언 손을 숨을 불어 녹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멀리서 익숙한 승용차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해준은 백기가 대답하기 전에 손을 뻗어 히터를 켰다. 



“아닙니다. 방금 나왔습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해준의 차를 몇 번 본 적 있었으나 동승한 건 처음이었다. 렌트한 차처럼, 차 안엔 휴대폰 거치대를 제외하곤 개인 물건이 거의 없었다. 백기는 눈앞에 굳게 닫힌 서랍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열면 캐러멜이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면서. 차 곳곳에서 해준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괜히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원래 아침 안 먹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백기는 아, 따위의 감탄사로 반응을 했다. 가면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라도 준비할까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 



 “장백기 씨는 아침 챙겨 먹습니까?”



해준이 백기의 얼굴로 향해있던 히터를 아래로 내렸다.  



“저도 뭐 식사…까지는 못 하구요. 가볍게 두유나…과일이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챙겨 먹기 힘들더라구요.”

“혼자 살면 아무래도 그렇죠.”

“대리님은 혼자 사십니까?”

“네. 혼자 삽니다.”



어쩐지 또 취조하는 모양새가 되어가는 것 같아 백기는 무안해졌다. 아, 벌써 막막해진다. 


물 흐르듯이 다음 순번인 애인의 유무를 물으려다 다시금 입을 꾹 다물었다. 단둘이 술을 마셨던 날의 폭탄 발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남자 좋아합니다’ 당연하게도 해준은 이후로 아무렇지 않아 했기 때문에 백기에게도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때때로 그 대답이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불쑥 튀어나오곤 했는데 보통은 해준에 대한 잡념이 피어오를 때였다. 애인은 있을까? 일하느라 바쁜 사람이라 없을지도. 하지만 일은 일이고 연애는 연애지. 강해준처럼 일과 사생활이 철저하게 분리된 사람은 충분히 가능한 전제야. 모르는 새에, 끊임없이 걸려오는 블루투스 이어폰 속으로 달콤한 연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가는 지도 몰랐다. …달뜬 상상이 식는 기분이다.  


승용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백기가 작게 하품하는 걸 눈치챈 해준이 온풍이 나오던 히터를 껐다. 



“피곤하면 눈 좀 붙여요.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할 거예요.” 

“아닙니다.”



해준이 배려를 해주었으나 백기는 운전하는 사수 옆에서 잠을 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풍경이나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석율의 조언 같지 않은 조언들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백기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어제 출력해둔 회의 자료를 꺼냈다.  


깨알 같은 글씨를 보고 있자니 이번엔 멀미가 난다. 뻑뻑한 눈을 비비다 백기는 곁눈질로 운전석의 해준을 본다. 운전에서도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승용차의 앞좌석에 앉으면 때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던 백기에게도 편안한 여정이었다. 고속도로의 아스팔트처럼 매끄러운, 그리고 다분히 기계적인. 저도 모르게 아예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고 있었는지 해준이 백기를 돌아보았다. 왜요? 백미러를 보는 것을 보니 얼굴에 뭐라도 묻은 줄 아는 모양이다. 백기는 아니라고 하며 애꿎은 안경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회의 자료 보고 있는 거예요?”

“네. 어제 좀 찾아봤습니다.”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대규모 회의라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니까요.”

“네…….”



백기의 위로 큰 표지판이 보였다 사라졌다. 목적지까지 10km. 해준이 말했다. 다 왔습니다.  






**






백기는 긴 테이블에 놓인 쿠키를 죽 둘러보며 입술을 뜯었다. 해준이 단 걸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것저것 가져가 보는 게 좋은 선택일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초콜릿 쿠키를 들었다가 다시 놓고 낱개로 포장된 파운드 케이크를 다시 들었다 놓았다. 해준이 과자를 썩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 년이 넘게 옆에 앉아있으면서도 그가 주전부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백기가 테이블 끝에서 발견한 건 커피머신이었다. 아무래도 무난한 커피가 좋겠지. 


리플렛을 옆구리에 끼고 커피 두 잔을 받아 도는데 뒤에 사람이 있었다. 발견하지 못해 부딪칠 뻔 하여 백기는 급히 컵을 몸 안쪽으로 당겼다. 반동으로 커피가 다리로 쏟아졌다. 



“아 뜨ㄱ...!”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커피가 쏟아진 순간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부딪친 젊은 여자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휴지를 찾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락처 남겨주시면 세탁비라도….” 

“괜찮습니다. 많이 쏟은 건 아니라서요.”



마 부장에게 뜨거운 커피를 맞을 적이 생각났다. 백기가 화장실에서 바지를 닦으며 그때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애써 위안했다. 검은 바지라 다행히 얼룩이 보이지는 않았다. 



회의장으로 돌아왔을 때, 해준이 백기를 보며 뭐 하느라 이제 오느냐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으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묻지는 않았다. 백기 또한 대답 대신 몸을 숙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백기는 젖지 않은 리플렛을 해준에게 주고 자기 것도 펼쳐 본다. 여태껏 경황이 없어 느끼지 못했는지, 시간이 흐르며 커피를 쏟은 쪽의 다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해요?”



통증을 참는 백기를 눈치챈 것인지 해준이 조용히 물어왔다. 백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바지를 걷었다.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벌건 자국이 다리에 나 있었다.  



“여기 화상 연고 있습니까?”



세미나가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해준은 백기를 끌고 나와 의무실을 찾았다. 




 

“뭐에 데인 거예요?”

“커피….”



다행히 심한 화상은 아니었다. 백기의 다리에 약과 밴드가 붙었다. 바지에 약이 묻지 않도록 처치된 붕대를 보니 마치 골절상이라도 입은 것 같다. 가벼운 상처가 큰 사고처럼 보여 백기는 제 사수를 볼 면목이 더욱 없어졌다. 내려다보는 해준 앞에서 그는 사고뭉치라도 된 기분이었다. 


돌아온 회의장에서는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마칠 시간이 다 되었다. 



“대리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세미나도 놓치시고…….”



백기는 정말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껏 따라와서는 일만 벌이고, 들은 건 없고. 차라리 해준 혼자 왔으면 세미나라도 온전히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백기는 해준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못마땅해할 것 같았던 해준은 뜻밖에도 태연했다. 괜찮습니다.    

  


“모처럼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나온 거니까요.”



돌아본 백기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






회전문을 타고 들어오자 난방된 건물의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가볍다. 백기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영이를 발견하곤 미소를 띄웠다.  



“아. 백기 씨. 어젠 잘 다녀왔어요?”

“네.”



어디였어요? 영이의 물음에 백기가 대답했다. 그곳이라면 영이도 볼 일이 있어 작년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신기했었는데. 놀 데는 아직도 없죠?”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끝나자마자 그냥 왔어요.”    

“거기 교통편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거든요. KTX도 아직 안 다니고. 뭐 타고 갔어요? 버스?”

“아뇨. 대리님… 차로 다녀왔어요.”



‘대리님의 차’ 라는 말을 하자마자 영이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백기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애매하게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화제는 세미나 이야기로 바뀌었다. 백기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세미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에 놀랐다. 그럴 법도 하지. 불과 하루 전의 일을 떠올리며 자조하던 중에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해준이 있었다. 해준은 엘리베이터에 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영이가 먼저 인사하자 백기가 뒤늦게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영이가 가봐야겠다는 듯 손짓을 했다.



“아, 그럼 이따 봐요.”

“네.”



백기도 해준에게 가벼운 목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닫히는 문 사이로 그의 눈앞에 백기의 곧은 등이 보였다.  






**






해준은 자원팀에 가려던 일어서던 중에 유리창 너머의 익숙한 두 인영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의 안영이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을 벌리고 웃는 장백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들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눈이 훑은 것은 장백기의 다리였다. 다행히도 절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백기의 상처를 보고서도, 해준은 그에게 왜 커피를 다리에 쏟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잘잘못을 추궁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는 책임을 묻고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것에 능하지 못했다. 해준이 당시 든 의문은 한 가지뿐이었다. 왜 미련하게 아픈 걸 참고 있는지.  




백기가 돌아온 건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후였다.



“장백기 씨 시간 봐요.”



1시 10분. 10분 늦었다. 석율이 찾았다던 맛집은 회사 건물에서도 꽤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흐른 지도 몰랐다. 백기는 저를 쳐다도 보지 않으며 말하는 해준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양치까지 마치고도 10분 먼저 앉아있던 백기에게 한 번쯤은 너그러울 수 있지 않을까. 백기가 무어라 변명하기 전에 해준이 다시 말했다.



“오전까지 마치라고 했던 보고서는 어딨습니까.”



아. 백기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석율이 일찍 만나자고 하도 성화였던 탓에 급히 나오느라 해준에게 전달하는 것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아… 아, 그거, 마무리는 지었는데……. 금방 보내드리겠습니다.”



급히 폴더를 열어 파일을 찾았다. 분주히 자판을 두들기던 백기에게 해준이 또다시 툭 물음이 던져진다.

 


“미얀마 수출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오늘 답변 왔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컨펌 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간단한 요청 건이라도 참조 꼭 넣으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야 나한테도 답장이 온다구요.”

“……지금 포워딩해드리겠습니다.” 

“장백기 씨 정신 어디 두고 다닙니까?” 



해준이 말과 동시에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에 백기는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란 것은 비단 백기뿐이 아닌듯싶었다. 주변의 소음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해준이 큰소리를 내는 일은 드물었기에, 사람들은 무슨 일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소리죽여 살펴보는 것 같았다. 백기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보내요.” 



해준은 그렇게 말하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백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노트북으로 몸을 돌렸다. 메신저가 밑에서 깜박거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확인할 사정이 못 되었다. 



“장백기 씨는 왜 그렇게 부주의합니까?

“…….”

“그렇게 부주의하니까 사고 나고, 다치는 겁니다.”

“…….”



분주히 타이핑을 하던 백기의 손이 멈췄다. 백기가 천천히 해준을 돌아보았다. 싸늘한 눈빛이 그를 마주했다. 백기의 턱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기는 억울한 얼굴로, 왜 자길 싫어하느냐는 그때의 그 얼굴로, 해준을 보고 있었다.



“그건, 대리님. 제 잘못… 아니었는데요.”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팽팽한 긴장만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백기는 해준을 노려보았다. 간간이 주위에서 들리던 키보드 소리도 멎었다. 백기는 정말로 소리가 멎은 건지 아니면 분노로 무엇도 들리지 않게 된 건지 알지 못했다. 끝내 차가운 침묵을 깬 건, 해준의 자리에서 울린 전화벨 소리였다. 해준은 백기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수화기를 당겨 귀에 가져다 댔다. 



“강해준입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해준이 파일들을 들고 일어섰다. 

 


“아까 말한 거 나 올 때까지 해둬요.”



그러고는 가장 위에 있던 페이퍼를 백기의 책상에 탁 올려두더니, 파티션 너머로 사라졌다. 백기는 스르르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간신히 눈물을 참느라 부릅뜬 그의 눈에서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이 보였다.


 




-

~뜻밖의 연재~

제목을 붙여봤는데 리맨물을 쓴다면 꼭 써보고 싶었던 (ㅋㅋㅋ)


'未生'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준백기] 반려 4  (1) 2015.01.11
[하강]  (0) 2015.01.06
[해준백기] 단문1  (0) 2015.01.04
[해준백기] 반려 3  (4) 2015.01.03
[해준백기] 반려 1  (0) 2014.12.29
#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