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달과 밤 上 # 未生 2015. 3. 4. 19:44

달과 밤

해준백기


(上)




- 대리님, 대리님……. 안 돼요.

- 조금만, 조금만 더.

- 대리님, 그만…….

- 다 왔어, 이제 조금만 더.


절정을 향하는 동안 허리에 감긴 다리가 뻑뻑하게 조여 왔다. 그 순간 무엇으로 세게 맞은 듯 충격과 함께 블랙아웃.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곧 해준은 눈을 떴다. 숨을 고르며 눈에 익숙한 천장을 본다. 텅 빈 옆자리를 보며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갔나. 눈앞이 번쩍하더니 캄캄해진 후로 기억이 없다. 근래 피곤했는지 기절하듯 잠든 탓이리라 해준은 생각하며 탁상시계를 들었다. 당장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지각이다. 관자놀이께의 통증이 오늘따라 심했다. 해준은 서랍 위를 더듬어 알약을 꺼내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오셨습니까, 대리님.


늘 들려오던 익숙한 목소리 대신 환하게 인사를 하며 자신을 맞는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장백기는 어디 가고 낯선 사람이 그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자 낯선 이는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장백기 씨는 어디 갔습니까?”



인사이동이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그러자 홍 대리와 신다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누구요? 하고 되묻는 그들을 뒤로하고 해준은 굳은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기다린 것처럼 흘러나오는 메시지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통제가 힘든 녀석이긴 했지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사라질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을까 싶어 간밤의 나눈 대화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럴만한 징조는 전혀 없었는데. 해준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낯선 이름표가 걸린 자리를 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장백기가 어떤 부서로 갔는지, 혹은 회사를 옮겼는지 알아야했다.



“왜 기억을 못 해. 너네 인턴이었잖아.”

“인턴? 걔 이름이 장백기였나?”

“아닌데. 강 대리님 우리 인턴 이 씨였는데요.”

“강 대리 가끔 오락가락 할 때 있어.”



이상한 사실은 그뿐이 아니었다.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누구도 장백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었던 팀원들뿐만 아니라 그가 인턴생활을 했던 자원팀에서조차. 그들은 장백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단체로 자신을 놀리기 위해 꾸민 짓이 아닌가 싶어 장난치지 말라며 표정을 굳혀보아도 그들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 해준은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입사한 적이 없다고요?” 해준은 인사팀 대리의 말에 반문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올해 신입사원은 셋이라고 했다. 한석율, 안영이, 장그래. 그 안에… 장백기는 없었다. 어제까지 멀쩡히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입사한 이력조차 없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비상계단으로 나온 해준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응답이 없다.


퇴근 후 찾아간 그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장백기는 아무래도 철저히 과거를 지우고 떠난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로 증발해버린 거냐. 자신의 연인이었던 이는 자고 일어나니 완벽하게 없었던 사람이 되어있었다. 해준은 대문을 나와 참담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이끌었다.



해준이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에 내려왔을 때였다. 그의 옆으로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해준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낡은 점퍼에 손을 찌른 남자는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걷고 있었다. 장백기. 해준은 걸음걸이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안경 모양은 달랐어도 분명 그였다. 백기는 그와 반대편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해준은 확인해야 했다.



“장백기?”



남자는 움찔하더니 해준을 돌아보았다. 해준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장백기. 맞지.”



그의 돌발행동에 해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기가 난데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준은 그의 뒤를 따라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달이 환히 비추는 길가의 추격전이었다. 중학생 시절 육상 선수였던 해준은 시간이 흘러도 달리는 것만은 자신이 있었기에 금세 따라잡아 어둑한 골목에서 백기-로 추정하는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벽에 몰아붙였다. 검은색 모자가 벗겨져 바닥을 뒹굴었다. 필사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버둥거리는 백기에게 해준이 물었다.



“장백기 씨.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아직 입금 안 됐구요. 돈 안 받았으니까 괜찮은 거 아니에요?”

“…….”

“…….”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경찰 아니에요?”



해준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경찰이라니. 백기는 그를 경찰로 착각하고 있었다. 바들바들 떠는 백기의 몸에서 해준은 힘을 빼고 낮게 읊조렸다. 



“경찰 아닙니다. 장백기 씨. 나예요.”

“……누구신데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나 몰라요?”



차라리 장난이라고 해. 이 모든 게 날 놀라게 하고 싶어 저지른 일이라고 말해. 해준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백기는 그의 눈을 피했다. “장백기!” 크게 소리치자 백기는 신경질적으로 해준의 팔을 떼어냈다. 누군데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해준은 헛웃음을 냈다.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게 아니고서야…. 



“강해준. 원인터 철강팀 대리. 당신 상사.”



백기는 구겨진 점퍼를 탁탁 털고선 해준을 이상한 사람 보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홱 뒤를 돌았다.  



“그리고 네 애인.”



그 말에 백기는 걸음을 멈췄다. 이건 부정 못 하겠지. 예상과는 달리 그는 해준을 보며 어이없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 갑니까. 거기 서요.”



하지만 백기는 그를 무시하고 걷기 시작했다. 해준은 멈추라고 몇 번 더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별다른 수가 없었다. 따라가는 것밖에는. 



“따라오지 마요.”



길이 환한 큰길을 벗어나 언덕을 오르고, 안에 사람이 사는 건지 의심스러운 어둑한 판잣집들을 지나 백기는 콘크리트로 막아놓은 벽의 틈으로 들어갔다. 해준은 급히 그를 따라 숨겨진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요즘은 스토커를 애인이라고도 부르나 보죠?”



안으로 들어서자 놀랍게도 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공간이 나타났다. 백기의 주거지로 추측되는 작은 방에선 쿰쿰한 곰팡내가 났다. 해준이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사는 겁니까? 백기는 얇은 이불을 덮고는 그렇다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경찰 얘기는 뭡니까. 설마 경찰에 쫓기기라도 하는 겁니까?”

“내 스토커면서 그것도 몰라요?”



한쪽 벽면은 집기들로 차 있었다. 해준은 살림 가지들 위로 꽂혀 있는 책 앞에 서서 독일어로 쓰여 있는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책의 가장자리에는 학번이 적혀 있었다. 기억하기로 그의 것이 분명한. 이것으로 이 자는 장백기의 도플갱어 따위가 아닌 자신이 찾는 장백기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백기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해준이 등을 돌린 사이 그의 가방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짜 경찰 아닌지 알아야 해서.” 해준은 말없이 흩어져 있는 자신의 소지품들을 넣었다.   



“아까 그거 좀 얘기해봐요. 스토커 아저씨. 절 어디서 처음 보신 거예요?”



백기는 어느새 경계를 풀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해준을 보고 있었다. 해준이 사복 경찰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건지 천진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스토커가 아닌 것도 증명해야 하는 건가. 해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이라.’ 백기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해준은 입사 전부터 백기를 알고 있었다. 이름을 안 건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인턴 중에 싹싹하고 일 잘하는 놈이 하나 들어왔다고 했지.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하 대리에게 목청 높여 인사하던 너. 언제나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는 뭐든 다 해내겠다는 얼굴이던 너. 근거 없는 의욕을 경계하라고 조언하면서도 너를 만든 건 그것이 팔 할이었다는 걸 안다. 그때만 해도 네 직속 상사가 되리라는 걸, 그리고 연인으로 관계를 키워나갈 거라는 걸 꿈에라도 알았을까. 



“나는 당신을 알고 당신도 날 알아요. 어떻게 하면 기억해 낼 수 있겠습니까?”



백기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해준의 눈은 책장을 훑다가 익숙한 제목에서 머물렀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위로 먼지가 뽀얗게 쌓였지만 상태는 깨끗했다. 이거, 좋아하는 책이죠. 해준이 책을 꺼내 백기에게 내밀었다. 백기는 책을 건네받더니 잠시 상념에 잠긴 듯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백기는 곧 고개를 들었다.  



“진짜 스토커 맞나 보네. 반은 틀렸어요. 퇴학 먹은 뒤로는 한 번도 안 펼쳐 봤거든요.”



그리고는 책을 밀어내었다. 먼지가 허공 사이로 흩어졌다. 뭐라고? 해준은 그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졸업을 안 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장백기는 졸업을, 무려 차석으로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야 맞는 건데. 그래야 하는 것인데. 만약 졸업을 하지 못해 입사를 못 한 것이라면. 그래서 장백기를 아는 사람이 없는 거라면. 만약, 아주 만약에 자신이 장백기가 졸업하지 못한 차원에 와 있는 거라면. 하지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해준은 먼지로 덮인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퇴학은 왜 당한 겁니까.”

“별 건 아니었어요. 시험 좀 대신 봐줬다고 쫓아내더라구요.”

“…….”

“졸업시험이었는데 그 형이 영어를 드럽게도 못했거든요. 대신 봐주면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준다고 했어요. 뭐 둘 다 낼 필요 없게 됐지만요.”



말도 안 되는 가설의 아귀가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해준은 이제 자신이 언제 이곳으로 온 건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리시험 봐주고 다니는 겁니까. 아까도 내가 경찰인 줄 알고 도망친 거고요.” 

“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

“꽤 짭짤해요.”

“가죠. 장백기 씨 여기 있을 사람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요?”



해준의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한 마디도 그냥 네 하는 법이 없는 백기는 대답조차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해준은 판단이 빠른,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다. 장백기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야 했다. 블랙아웃 된 건 자신의 침대, 시점은 섹스의 막바지였고 같은 상황을 만든다면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걸 기대해볼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보다 나은 생활은 보장하죠.”

“……공짜예요? 용돈은요?”

“돈 필요하면 가서 청소라도 하든가.”

“얼마나 주시는데요. 저 비싼데요.”



구시렁대면서도 짐을 챙기는 모양새가 퍽 그다워 웃음이 나왔다. 하는 거 봐서. 가죽 가방이 하나인 백기의 짐은 단출했다. 가죠, 아저씨네 집. 백기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뜬 얼굴을 하고 해준을 재촉했다. 근데 아저씨 이름이 뭐라고 했죠? 강 무슨? 해준은 돌아오지 않을 작은 방을 나서며 말했다. “강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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