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호백기] 오늘 날씨 어때요? # 未生 2015. 3. 30. 21:12

* 크로스오버

치호(스물)백기(미생)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동이 트여있었다. 야근 후 동창회에 참여했던 게 화근이었다. 여즉 풀리지 않은 숙취에 백기는 기지개를 죽 키며 뻐근한 몸을 끼워 맞추었다. 출근 한 시간 전. 묵묵부답인 알람 시계를 몇 번 흔들다 내려놓고, 백기는 바닥에 늘어진 바지에 다리를 꿰었다. 오늘도 여유롭게 출근하기는 실패일 성 싶다. 만원 지하철 객실 내에서 뿜어지는 이산화탄소에 백기는 기어코 눈을 감아버리기로 한다. 막히는 도로에 길에서 한세월, 인파 사이로 몸을 비집고 역 밖으로 나오길 한세월, 건물 앞에서 비로소 맑은 공기를 폐에 담뿍 담은 백기는 곧이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물러서려는데 기다란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주변의 눈들이 하나같이 사복 차림의 그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저 얼굴에 저 길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지. 백기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 일찍 왔네.”

“일찍 일어났거든요. 제가 요즘- 아주 부지런해요. 형도, 일찍 오셨네요.”

“응. 늦잠 잤거든.”



경쾌한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백기는 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백기와 치호가 먼저 들어서고 사람들이 그 앞을 차례대로 채웠다. 나란히 서게 된 탓에 그제야 그의 옷매무새가 눈에 들어온다. 본 적 없는 근사한 셔츠와 균형 잡힌 몸에 적당히 달라붙는 면 소재의 바지. 퇴근 후 놀러라도 가는 걸까. 평소의 치호는 편한 차림을 고수했다. 잔뜩 멋을 내고 온 첫날, 먼지를 죄 뒤집어쓰고는 상황을 빠르게 깨달은 덕이었다.  


“오늘 어디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치호가 뾰족한 눈으로 백기를 본다.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백기는 의미를 알 수 없어 어깨를 으쓱했다. “리얼리?” 치호가 헛웃음을 냈다. 백기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자 한껏 격양된 목소리를 내었다. 



“좋은 곳. 그곳. 설마 준비 안 해온 거?”

“나? 내가 왜.”

“아, 왜애애-! 오늘 같이 클럽 가기로 약속했잖아요.”



돌아보는 사람들에 백기는 황급히 치호의 입을 틀어막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너 미쳤어? 여기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고! 치호는 가볍게 백기의 손을 떼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한껏 누그러뜨리며 미안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니 더 혼낼 방도가 없었다. 15층에 다다르기 전 털어내듯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이윽고 둘만이 남았을 때.




이름 차치호, 올해 나이 스무 살, 인사기록부에 적혀있기에는 사무보조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샘플 닦기인. 그는 철강팀의 단기 아르바이트생이자 차 과장의 조카였다. 오죽 못났으면 놀고 있어 큰아버지가 일자리까지 마련해주고 있느냐는 소문이 횡행했으나, 담당인 백기로서는 그 알바생이라는 사람이 못난 놈이든 잘난 놈이든 ‘과장의 조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카, 혈연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차치호라는 인물 자체였다.



“지금 뭐, 뭐하는…….”

“와- 닮았다. 형 안경 벗으니까 제 친구랑 진짜 닮았어요. 존나 닮았어.”



초점이 맞지 않아 얼굴을 찡그렸다. 손에 들린 안경을 가져가려고 하자 이번엔 팔을 높이 올려 닿지 않게 흔들었다. ‘유치하게.’ 치호가 진짜 안 보이냐며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야, 그건 보이거든…. 안경 이리 줘.” 백기는 까치발을 들어 안경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치호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장난치지 마.” 백기의 바늘은 굴욕과 화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기판이 막 터지려던 참에……! 안경이 손바닥 위로 떨어진다. 안경을 고쳐 쓴 백기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요즘 애들은 체형부터가 우리 때랑 다른 것 같단 말이지. 백기 또한 작은 키가 아니었으나 유달리 기다란 치호는 자존심 상하게도 턱을 들어 올려다 보아야했던 것이다. 



“형, 김 씨예요?”

“아니.”

“그럼 외가 쪽이 김 씨신가?”

“아니. 김 씨 없어. 오늘은 이쪽 하면 되고….”

“장백기 씨.”



불린 이름에 백기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창고 문 앞에 해준이 와 있었다. 



“내일 8시에 건영 쪽이랑 미팅하기로 했으니 회의실 잡아두고, 미리 연락 돌려 둬요. 나는 오늘 외근 있어서  먼저 나가니 알아서 퇴근들 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어디서부터 들었으려나. 아르바이트생과 똑같이 놀고 앉아 있었다거나 아르바이트생에게 격없이 휘둘리고 있었다거나……. 어느 쪽이든 알게 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백기와 치호에게 번갈아 시선을 둔 해준이 창고를 나섰다. 백기는 모았던 숨을 뱉어내며 뒤를 돌았다. 돌아본 곳의 치호는 해준이 진작 사라진 문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존나 멋있어. 존나 잘생겼어. 나 대리할래.



미친놈. 백기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형은 저 사람 싫죠. 맨날 지 할 말만 하고 가고 이거해라, 저거해라.

치호야, 있지.”

“짜증 나죠. 솔직히 계급장 떼고 한 판 붙고 싶죠.”

“아니. 전혀. 그리고 회사에서는 언제나 말조심해야 돼.”

“아니야 아니야, 이 상황 아주 낯이 익어. 혹시 좋아하는 건가?”

“…….”

“헐. 대박. 이건 아니라고 못하네. 진짜예요? 대박. 그냥 해본 말인데.”

“…….”



그가 온 지 일주일 만에 동기들이 자처해 장백기의 위로 파티를 열었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게 아닐까요.” “백기 씨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세게 나가요.” “과장님 조카라잖아. 한 대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걔가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만만하게… 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성격이 원래 그런 것 같아요…….”

“두 달만 참아. 윗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아랫사람이 그러는 게 백 배는 낫잖아.”



위로랍시고 건네진 말은 애달프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네에…. 그렇죠…….”



백번 낫죠. 하, 하하.






‘백기 씨. 알바 지금 놀고 있는 것 같던데요.’ 영이의 귀띔에 백기는 작성하던 보고서를 그대로 두고 자재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쿵쾅쿵쾅 일부러 오고 있다는 티를 내어도 여유로운 자세는 무사고정이다. 이어폰을 양쪽 귀에 끼고 흥얼거리던 치호는 백기를 발견하고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백기는 팔짱을 끼고 서서 치호를 노려보았다.



“들어볼래요?”

 


백기의 화가 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호는 이리 와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얼르은-! 백기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막무가내로 귀에 이어폰을 끼워오는 바람에 몸이 잠시 기우뚱하고 기울었다.



“완전 신나죠. 춤추고 싶다. 춤출래요?”



귓속을 파고드는 요란한 템포와 멜로디. 음악이었다. 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음악. 백기는 이어폰을 빼내며 물었다.



“할 일은 다 하고 쉬는 거야? 오늘 C-8칸까지 전부 닦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가서 보세요.”



백기는 번호 아래의 바구니를 꺼냈다. 반짝반짝한 샘플들이 조명에 빛이 났다. 오늘 삼십 분 일찍 가도 돼요? 멀리서 천진하게 묻는 목소리에 백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 과장의 출장 소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거늘. 누굴 꾀어서 알아낸 거냐. “그래, 그래.” 백기는 귀찮은 듯 손사래를 치며 창고를 나섰다. 



“가기 전에 정리하고. 다음 주에 보자.”   





강 대리가 사우나에 가는 날인 터라 더 할 일이 없었던 백기도 정시 퇴근을 했다. 일찍 가면 안 되냐고 물어 놓기까지 한 치호가 정문 앞에 앉아 있었다. 백기는 그를 힐끔 보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역시 그를 기다렸던 것이었는지 치호는 백기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약속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안 가고.”

“약속은 형이랑 있었죠. 형이 파토냈지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 하지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멋대로 약속을 잡아 놓고는 파토냈다며 성내는 꼴이라니. 물론 못 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동행자가 필요했던 걸 게 뻔해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것이었지. 



“어디 가요?”

“집.”

“회사, 집, 회사, 집. 그러니까 애인이 안 생기는 거예요.” 

“넌 어디 가는데.”

“형네 집이요.”



백기는 전광판으로 다음 버스를 확인했다. 10분 후이니 의자에 앉기로 한다. 치호가 따라서 백기의 옆에 앉았다. 백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집 더러워. 안 치웠어.”

“약속 공친 게 누군데.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에.”

“내가 언제 약속을 했다고 그래?”

“아아, 됐고. 오늘 저녁 형이 책임져요.”



안 된다고 말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후에는 뻔한 상황의 연출. 치호는 백기를 따라 버스에 타고 백기를 따라 내렸다. 노란 가로등 불 아래 골목을 오르며 치호가 투덜댔다. “이러고 매일 어떻게 다녀요?” 어떻게 차도 없이 사냐며 구시렁대더니 다음엔 자신이 태워다 주겠다고 한다. 그래, 차도 없고 집은 작고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와서 뭐할 건데? 치호는 한껏 기대하는 어조로 말했다. 



“저녁 먹어야죠.”






저녁은 피자였다. 만들어달라고 하는 양인가 싶어 메뉴를 고민하던 차, 제가 만든 것은 먹지 않겠단다. 백기는 계산을 하면서 어째 자신이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적우적 피자를 씹는 치호는 한창때답게 단숨에 두 쪽을 먹어 치웠다. 백기는 한쪽을 먹고 질린 탓에 그의 앞으로 아예 상자를 밀어 둔 상태였다.  



“형, 저한테 진짜 재밌는 시나리오 하나 있거든요. 한 번 들어볼래요?”



치호의 꿈은 영화감독이라고 했다. 주말에는 현장에 나가 일을 배우기도 한단다. 기껏해야 선 자리에서 시간을 때울 때 보는 것 외에는 영화와 연결고리가 없는 백기로선 그의 꿈이 막연하고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무서울 것 없이 노는 것 같아 보여도 꿈은 가지고 있구나. 하지만 곧이어 늘어놓는 황당한 이야기들에 백기는 허망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 무슨 행성?’ 그 시나리오라는 것의 내용인즉슨, 남자 성기에 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고대에 인간에게 없던 성기를 숙주처럼 심어둔 외계인들이 현대에 와서 그것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 지구에 침공한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형도 조심하라구요. 쓸 일이 없다고 나 몰라라 하지 마시구요.”



풉. 콜록, 콜록. 사레가 들린 백기가 기침을 했다. 치호가 능청스럽게 티슈를 건넸다. 입가를 닦아내고선 한마디 하려는 찰나, 턱, 얼굴이 먼저 잡힌다. 



“……!”



그리고는 입술이 와 닿았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백기는 그대로 굳어 눈을 크게 떴다.   



“맞네, 남자 좋아하는 거."



얼굴을 뗀 치호가 웃으며 말했다. 치호가 내려다본 곳은 침공 준비라도 하듯 꼿꼿하게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外>



점심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속속들이 건물로 복귀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의 번잡한 화장실은 여러모로 불편하기에 백기는 식사를 마치는 즉시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다. 개인용무로 구애받지 않는 때 또한 이 시간뿐이었다. 적당한 포만감과 적절한 나른함, 지금은 또한 잠이 오기 좋은 때다. 가물가물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백기는 하얀 화면을 힘주어 보았다. 그때, 비뚤게 접힌 종이가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멀리 살필 것 없이 눈에 들어오는 치호의 뒷모습. 어슬렁어슬렁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듯 하다가 엘리베이터 앞에 이윽고 멈춰 선다. 백기는 종이를 열었다. 


「옥상으로」




“뭐하냐 너.”

“나랑 사귈래요?”



백기는 제 가슴에 얹혀져 있는 치호의 손을 떼어냈다. 담배나 같이 하자는 줄 알았더니, 훨씬 맹랑하고 대담한 짓을 하고 있다. 



“싫어. 내가 왜?”

“저는 어리고, 귀엽잖아요.”

“어리고, 귀여운 건 내 취향이 아닌데? 그리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랑 사귀니.”



학벌 좋지, 똑똑하지, 잘생겼지, 안정적인 직장에 돈도 잘 벌고, -비록 전세지만-안락한 내 집도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백수 철부지를 만난담.



“싱싱하잖아요. 원래 형처럼 돈 잘 버는 아저씨들이 옆에 어린 애인 하나씩 끼고 있고, 막 그러지 않나?”



백기는 남자 중에서는 철강본부 전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렸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아저씨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으며 백기는 움켜쥐어 구겨진 셔츠를 가볍게 털어냈다. 



“어려서 뭐. 어린 게 밥 먹여줘? 그리고 난 미필이랑은 안 만나. 내 나이가 몇인데 고무신을 신어.”

“아, 왜, 형은 효율성을 그렇게 찾아요. 무슨 기계도 아니고. 아니, 그리고 내가 군대를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나? 그만큼 어리다는, 뭐, 반증 같은 거 아닌가? 사람이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나 참.”

“할 말 끝났으면 먼저 간다.”



백기는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가야 할 시간임을 알렸다. 줘도 못 먹고. 에이, 진짜. 치호는 멀어져가는 백기의 등에 쯧 혀를 찼다. 



“기회 줄 테니까! 생각해보고 대답해줘요!”



치호의 외침에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걷던 백기는 뒤를 돌아 팔로 크게 엑스자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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