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Symbiosis| # 未生 2015. 4. 5. 12:03
Symbiosis
해준백기
인류의 문명화는 일만여 년 전에 이루어졌지만 우리의 삶은 그 전과 다름이 없다. 이빨과 발톱은 뭉툭해지고 위협적인 소리는 낼 수 없게 되었어도 보이지 않는 구조가 약자와 강자를 구분 지었다. 여전히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며 약자는 먹이사슬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약육강식의 원리는 현대에 와서 그 의미를 달리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마라톤의 출발 선상에서 막 발을 뗀 철강팀의 장백기 대리는 한 달 전 대리 직함을 다는 것과 동시에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어, 크흑.”
커피나 마실까 하고 들어온 휴게실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아는 척을 하려던 차에 그가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마에 짚은 손가락은 짧게 다듬어진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목선만큼이나 매끈했다. 15층에서 한석율을 마주했을 때 더는 그를 타박하지 않아도 되었다. 상자 안 가득 짐을 들고 15층에 내려왔던 날 백기와 영이는 진심으로 그를 축하했다. 인사이동이 있은 후로 석율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렇게 고비를 넘긴 것이라 안도했는데. 끙 하고 흘러나오는 신음에 혹여 새로운 고민이라도 생긴 것인지 걱정이 된다.
“왜 그래요. 안 좋은 일 있었어요?”
“갈림길에 봉착했어. 장 대리. 아니 백기야. 종이 쪼가리 동료가 아닌 인생 친구로서 나 도와…줄 거야?”
“네.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요.”
“점심에 돈가스랑 제육, 뭐 먹을까? 일생, 일대의 선택.”
“…….”
반면, 생존 싸움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는 이도 있다.
**
총원 15명. 명실상부 원 인터내셔널의 차기 주력 사업 분야인 철강부. 그중에서도 단연 성과가 돋보이는 철강 1팀은 강해준 과장의 지휘 아래 새로운 체제로 새로운 발돋움을 시작한 지 1년을 맞이했다. 지난 창사 기념식에서는 우수 실적 팀으로서 포상금을 받았고 격려 차원에서 사장이 직접 팀을 찾기도 했다. 회사에서 팀에 거는 기대가 큰 만큼 팀원들의 어깨에도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일정은 점점 빠듯해져 갔는데, 매주 수요일 아침의 업무보고 회의가 그랬다.
“좋습니다. 연지 씨는 내일까지 리스트 정리해서 나한테 주면 되고. 다음은 장 대리, 생산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네. 이번 주부터 공장 가동한다고 답변받았습니다. 근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야.”
“지난주 금요일입니다.”
“……장 대리.”
낮게 가라앉은 해준의 목소리에 여섯 개의 눈이 모두 백기에게로 향했다. 다음이 무엇인지 아는 백기는 저도 모르게 꼴딱 침을 삼켰다.
“네.”
“여태껏 확인을 안 하고 있는 게 말이 돼?”
“…….”
“거래처가 우리 일만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만들어 가져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거야?”
“죄송합니다.”
때 이른 빙하기. 회의실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고 테이블을 사이로 둔 두 사람 간에는 찬 바람만이 쌩쌩 불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백기의 얼굴이 어두웠다. 동료 대리가 위로하듯 백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지나갔다. 백기를 지나쳐 나간 해준은 2팀의 대리와 무엇이 즐거운 듯 앞에 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째서, 왜, 나한테만. 백기는 주먹을 쥐었다. 이내 쥐어진 주먹이 녹아내리듯 풀어진다. 고개를 든 남자의 눈은 새로운 다짐을 담고 있었다.
적자생존.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적응하기 힘들다면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 중 하나.
“오늘 점심 같이 하시죠.”
도전과도 같은 식사 약속을 한다.
**
해준이 이끈 곳은 회사에서 제법 떨어진 일식집이었다.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 해준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백기는 일식집의 간판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백기의 취향을 무섭도록 잘 집어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으로 마음이 풀어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성이었지만.
“요즘 무슨 얘기까지 돌고 있는지 아십니까.”
“제가 불쌍하답니다.”
“후배들한테 불쌍하다는 말까지 들어야겠습니까.”
해준은 제 앞의 남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불만을 토해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답 없이 백기가 좋아하는 새우 초밥을 골라 그릇에 덜었다.
‘유독 대리님한테 심한 것 같긴 해.’
‘원래 그랬대. 신입 때부터.’
‘그 정도면 싫어하는 거 아냐? 종일 얼굴 봐야 하는 사이인데 불쌍하네, 장 대리님.’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방해하지 않을 생각에 인기척을 내지 않은 것뿐이었다. 백기는 새어 나오는 말소리를 듣는 순간 위태롭게 쌓여있던 탑이 제 안에서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애써 부정해 왔던 것들과의 강제대면. 연인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철강팀 장 대리로서는 그의 기준에 한참 모자랐나 보다.
해준은 백기가 대리가 된 후로 그가 하는 모든 것들에 제동을 걸었다. 새로운 안건에는 토씨 하나까지 물고 늘어졌으며 거래처의 잘못 또한 확인하지 않은 담당자의 책임으로 백기를 불러 혼냈다. 이전에는 당연한 처사라 생각했다. 백기의 과실이 0은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해준 쪽에서 심하게 하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이 부당함에 맞설 것이다.
“해준 씨. 듣고 있어요?”
“회사 밖이라도 업무시간이야. 호칭 제대로 하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을 텐데.”
“그게... 네, 죄송합니다. 과장님.”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부서 옮기라고 했잖아.”
대리로 승진할 적에 그 기회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백기는 부서이동을 선택한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철강팀에 남기로 결정했다. “먹어. 아침도 안 먹었잖아.” 부지런히 놀리던 젓가락을 내려놓고서 해준은 백기의 앞으로 초밥이 담긴 그릇을 밀었다. 윤기가 흐르는 새우가 눈앞에 나타나자 단번에 입맛이 돈다. 먹기 전에 얘기 끝내려고 했는데. 백기는 못 이기는 척 새우 초밥을 한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철강은 묵직하게,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좋아요. 남자답구요.”
백기의 말에 해준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썩 그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했는가 보다. 거짓말같게도 남자의 미소에 마음 깊숙이 난 화가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기도 웃고 만다. 해준은 손을 들어 단정하게 고정된 백기의 앞머리를 쓸었다. 그새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다. 사무실 내에선 프로답게 굴라고 수없이 세뇌시키더니, 이건 또 무어람. 백기는 가만히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만 본다. 한낮의 작은 일탈이 싫지만은 않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봐. 너 동정표 얻고 있잖아.”
“아, 정말, 과장님.”
“오늘은 퇴근 일찍 해.”
“괜찮습니다. 어차피 할 일도 남아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빨리 마무리 짓고 가겠다는 뜻이야. 들어가 있어.”
이쯤 되면 누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백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회의를 오래도록 해달라며 몰래 전화를 걸고 싶다는 심술궂은 마음마저 불쑥 든다. 회의가 늦도록 지속되고 깊은 밤 헐레벌떡 들어와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을 함께 그리며. 어떤 식이든 손해 보는 건 백기 자신인데 말이다. 백기는 남은 우동 면발을 호로록 마신다.
**
“무슨 생각해.”
“과장님 나이가 언제 이렇게 드셨었나 생각 중이었어요. 여기 못 보던 주름이 또 하나 생겼네, 하고요.”
백기가 해준의 눈가를 살살 만지며 말했다. 입사한 지 5년. 강해준을 알고 지낸지도 5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5년간 백기에게는 두 번의 퇴사 위기가 있었다. 두 번 모두 오해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나를 싫어한다’는 다소 유치한 오해. 첫 번째 위기는 스스로 극복했으나 입사 두 달 차에 느꼈던 그 좌절감이 장난 같을 정도로 두 번째 위기는 강력했다. 그것은 바로 강해준의 결혼 소식이었다.
해준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건 해준이 이혼을 한 직후였다. 본격적인 교제를 시작한 것도 그쯤. 백기는 자신 때문에 해준이 이혼을 결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인과관계에 조금의 영향도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 추측했다.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에도 교제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백기는 해준에게 오명이 덧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도 해준은 타인의 시선에 무감했다. 이혼남 타이틀이 어떻냐는 물음에 ‘이제 누구도 나에게 결혼하라고 하지 않아서 좋다.’ 라고 대답했을 정도이니.
“너도 천년만년 이십 대일 줄 알았지.”
“전 그래도 젊습니다. 과장님보다 네 살은 항상 젊다구요.”
“호칭 제대로 하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안 고쳐지네. 장백기.”
“죄송합니다, 해준..씨.”
“당신 부모님 오랜만에 만나 뵈러 갈까.”
“안 그래도 강 서방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걸요.”
“모르는 사이에 서방이 됐네.”
농담이 오가는 와중에도 백기는 머리를 괴고 누워 해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흘러온 세월만큼 나이에 관한 농담들을 종종 던지지만 실제론 농의 반의반도 변한 것이 없다.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 안에는 시작할 적의 그것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많이 서운해?”
밤갈색 눈동자 또한 온전히 제게로만 향해있는 그 말간 얼굴을 고스란히 담았다. 담아도 담아도 부족해 더 담지 못해 조급하기까지 한 그 얼굴을. 무심코 던져진 질문은 더해진 설명이 없어도 대번에 이해가 가는 문장이었다. 백기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이해해 줘. 일부러라도 다그치지 않으면 달려가 안아 주고 싶으니까.”
순간 백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네? 지금 뭐라고…….”
“나를 위해서라도 다음엔 팀을 바꿔줬으면 해.”
해준은 일어나 주방으로 사라졌다. 백기는 해준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면 이건……. 곧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침실 안을 메웠다.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탈을 쓰고 강자의 행세를 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었다.
무시무시한 탈 아래의 것이 저와 다름없음은 역전할 기회를 가진 것을 의미했으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음에도 사슬을 유지하기로 한다. 제 옆의 강해준이라면 장백기는 감쪽같이 속아줄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식자 행세를 한다면 기꺼이 잡아먹혀 줄 터였다. 먹이라면 꼭꼭 숨겨 아껴놓을 것이고. 백기는 몸을 가뿐하게 일으켜 그가 사라진 주방으로 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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