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비행 # 未生 2015. 4. 15. 18:02

해준백기




운전수 강 씨. 차고에서 불리는 해준의 두 번째 이름이었다. 통칭 강 씨. 종종 호가 붙기도 했다. 어이, 강 씨. 커다란 트럭 앞에서 담배를 빼 드는 그의 손가락 마디마다 반창고가 감겨있었다. 선글라스를 고쳐 낀 해준은 나이 든 제 앞의 남자에게도 불을 붙여주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로 눈앞이 흐리기까지 한 차양 밑에선 간밤엔 얼마나 달렸는지, 갑자기 들짐승이 뛰어들어 사고가 날 뻔했다든 지와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연기처럼 일렁였다. 해준은 거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연기를 내뿜었다. 젊은데, 뭐하다 왔수? 나이 든 이가 히죽 웃자 듬성듬성 빠져있는 입안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출신지나 과거의 이력 따위의 것은 중요치 않았다. 일을 하는 데 통상 묻는 것들조차 불필요하여 해준은 이름을 채우는 칸에는 번번이 가짜를 적어 넣었다. “그냥, 회사에 다녔죠.”


해준은 도시에서 야간 트럭 운전을 했다. 자정 전 차고를 떠나 고속도로를 꼬박 달리면 동틀 녘 즈음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거기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으면 관리자 하나와 장정 여럿이 몰려와 내용물을 내렸다. 깨끗하게 비워진 후에는 꾸역꾸역 되돌아왔다. 차고에 도착할 때 쯤이면 해는 중천에. 시동을 끄는 것으로 일과는 끝이 났다. 집에 가기 전 역 앞 중국집에 들러 자장면을 시켜 먹는다. 늦은 점심을 먹는 이들만이 간간이 있는 가게의 빈 테이블에 자리 잡으면 달리 주문하지 않아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장면이 턱 앞에 놓였다. 해준은 그것을 허겁지겁 먹었다. 정신없이 허기를 채우다 문득 맞은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모습이 그토록 낯설 수가 없었다. 빛바랜 선글라스는 제 기능을 못 한지 오래였다. 해준은 선글라스를 벗어 놓고 거울 속 자신에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턱을 매만진다. 면도 좀 해야겠는걸.  




비행





이번에도 물 먹었네, 강해준. 해준은 매여있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을 거는 사람들을 뒤로했다. 힘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부장의 말은 으레 있는 인사치레였으나, 그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쓸쓸한 위로였다. 다음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다음. 다음이라는 게 있을까요? 혹자들은 줄을 제때 잡지 못한 해준의 탓이라 했다. 썩은 줄도 줄이라며. 그 썩은 줄을 잡다 떨어진 제 동기들은 빠른 상황 판단을 하며 옷을 벗어대던 중이었다. 당시 해준은 기로에 서 있었다. 길은 양 갈래였고 선택하지 않으면 후진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백기가 동업을 제안해온 것도 그때였다. 평소의 해준이라면 칼같이 거절했을 터였지만, 시기가 시기였기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한 집에 사는 동거인이었다. 그것은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을 의미했다. 백기는 충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해준이 쌓아온 노하우와 자본을 더한다면 승산이 없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오케이 사인과 동시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백기 덕이었다. 새로운 출발에 해준은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도 같았다. 공동투자자 중 하나가 돈을 모조리 들고 달아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본금과 대출자금 모두를 날렸다. 사업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의 일이었다. 잘해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죄여오는 손아귀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궁지에 몰리고 만 두 사람은 빚쟁이의 눈을 피해 잔금을 들고 야반도주를 했다. 불안함에 연신 입술을 뜯던 백기는 고속도로를 벗어나고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잠에 빠져들었다. 반면, 해준은 밤이 깊어갈수록 정신이 또렷해져 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운전대를 쥔 해준의 손에는 핏기가 없었다. 헤드라이트에 의지한 채 낯선 도로를 지나는 것은 그들의 처지와 다름이 없었다. 자신과, 백기의 앞길은 온통 어둠이었다. 해준은 비탈길에서 충동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가 뒤집어지는 순간에도 해준은 백기가 잠에서 깨지 않길 바랐다.  


비극적이게도 깨어났을 때 자신은 병실 침대 위에 있었다. 천장과 벽이 온통 희어, 처음엔 천국에 와있는 줄로만 알았다. 고개를 돌리자 옆 침대에는 호흡기를 단 백기가 있었다. 해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천국은커녕 지옥만도 못한 현실로 돌아왔다. 더 못나고 추잡한 꼴로. 백기가 깨어나는 데는 하루가 더 걸렸다. 백기는 깨어난 후 사흘 밤낮을 울어댔다. 동반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사고로 백기는 한쪽 다리를 절게 됐다. 


사흘 밤낮, 흔한 위로의 말 하나 꺼낼 수 없었다. 해준은 백기를 부축해 병원을 나서며 원죄를 품었다. 백기가 그렇게 된 것을 모두 제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일종의 죄책감에 기반한... 책임. 살아남은 이상 강해준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살아가기로 한다. 해준은 백기를 데리고 이름도 낯선 소도시에 가 쪽방 하나를 구했다. 




**




먹은 후에는 바로바로 치우라 그렇게 말해도. 한산한 낮의 거리를 터덜터덜 밟으며 되돌아온 단칸방은 온기 없이 싸늘했다. 싱크대 가득 쌓여있는 그릇들에 해준은 쯧 혀를 차며 팔을 걷어붙인다. 수세미로 벅벅 소리가 나게 냄비를 닦은 해준은 반짝반짝 윤이 날 때까지 냄비 바닥을 문질렀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수도의 꼭지를 세게 쥐어 잠그고 주변의 물기를 닦아내고 나서야 해준은 만족하며 얇은 천으로 덧댄 커튼을 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밥 먹어요. 흔들리는 어깨에 해준은 눈을 떴다. 창밖은 해가 져 캄캄했다. 소반에는 밥 한 공기와 국물 한 그릇, 김이 전부인 상이 차려져 있었다. 해준은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채로 밥숟갈을 입에 물었다. 




그들은 한낱 도망자였다.


백기는 사거리 근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다. 개발 중인 도시에는 인부를 구하는 곳이 지척에 널렸으나 불편한 다리로 몸 쓰는 일을 한다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해준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 앉아 있는 건 고행일 뿐이었다. 그날도 정처 없이 걷던 중이었다. 번화가 격의 사거리에는 편의점이니 카페니 하는 이곳에선 흔치 않은 것들이 있었다. 다방이 아닌 진짜 카페. 작은 카페 앞에서 백기는 향긋한 커피 냄새를 맡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지자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 세 장이 나온다. 백기는 행복한 얼굴로 그곳에 들어섰다. 얼마 만에 마셔보는 커피인지. 백기는 오래간만에 주어진 여유를 만끽했다. 꽃망울이 진 화분과 참나무 가구로 가득한 내부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벽에 붙은 문구가 들어왔다. <직원 구함> 백기는 카운터로 가 인상 좋은 중년의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사람 구하나요?”


인복은 있는가 보다... 라고 백기는 생각했다. 여사장은 절름발이인 백기를 종업원으로 고용했을 뿐 아니라 커피를 내리는 법과 간단한 베이킹까지 가르쳤다. 손재주는 타고났기에 배우는 건 금방이었다. 대가 없는 호의에 백기는 종종 의아해하기도 했으나 사장은 연중 열성이었다. 백기가 일에 적응했을 때 즈음 사장은 흘러가는 말처럼 늦은 답을 했다. 그의 눈에서 총기를 알아보았다고. 백기는 그 말에 울음 같은 웃음을 지었다. 동정이 아닌 인정. 밀가루를 뒤집어써도 부드러운 손에 굳은살이 늘어나도 백기는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그저 기뻤다.  




“다리 아프지 않겠습니까. 종일 서 있어야 할 텐데.”

“목발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카페 일을 돕게 되었다고 했을 때 해준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건넸다. 불편한 몸에 일이라니, 걱정이 앞섰으나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에게 더 생각해보라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 거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백기는 수저를 들다 말고 해준을 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해준은 그가 차라리 원망하길 바랐다. 왜 날 이렇게 만들었냐며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소리라도 지르면 적어도 속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진 않을 텐데.  



“끌어들인 건 저잖아요. 모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는 살 수 있었겠죠.”



백기는 상을 물렸다. 구석에 철퍼덕 앉는가 싶더니 어느새 주인에게서 얻어온 자격증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범하게. 해준은 오래간 그 단어를 곱씹었다. 




**




낮에는 백기가, 밤에는 해준이 일을 하느라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 나았는데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자려면 자연스럽게 몸이 부대끼고 한 사람은 잠을 뒤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있을 적 파티션을 가운데 둔 거리보다 가까운. 어쩌다 같이 잠이라도 자는 날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돌려 누웠다. 


천근만근 한 몸을 이끌고 집에 온 해준은 문을 연 채로 안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출근했어야 할 백기가 집에 있다. 차곡차곡 개어진 마른 수건 옆에서 백기는 세탁한 해준의 양말을 아랫목에 늘어놓았다. 밀린 집안일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양말을 차례로 진열한 백기는 놀란 얼굴의 해준을 지나쳐 끓고 있는 찌개 앞에 섰다.  



“오늘 휴무예요. 시간 난 김에 시내에 가서 책도 사고 찬 거리도 좀 사 올 테니….”



휴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쿵 하고 백기의 등이 닿았다. 딱딱한 벽에 등을 부딪친 백기는 골까지 울리는 통증에 눈썹을 찡그렸다가, 우악스럽게 입술을 무는 해준의 어깨를 버둥이며 밀어냈다. 해준은 백기를 잡아 고정한 채로 허리띠를 풀어냈다. 입술을 놓지 않은 채 아래를 더듬는 손에는 여유가 없었다.  



“자, 잠깐, 해, 해준..씨, 아!”



해준은 백기를 뒤집어 몰아세운 후 그의 얇은 속옷까지 끌어 내렸다. 백기는 포기한 듯 벽에 얼굴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해준은 지퍼를 내려 반쯤 성난 것을 꺼내 가볍게 흔들다, 로션을 발라 건조한 내부에 단번에 밀어 넣었다. 백기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 



“으앗, 으, 아..”



해준은 그대로 천천히 추삽질을 했다. 백기는 손톱으로 누렇게 변색된 벽지를 긁어대는 것으로 처지를 호소했다. 남은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듯 꾹 다물어진 입이 우스웠다. 억눌린 울음이 백기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참는 것이 자신을 더 자극한다는 것을 진정 모르는 걸까. 해준은 맥아리 없이 밀려나는 백기의 왼쪽 다리를 제 다리로 부목 삼아 고정시키고 그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고서 끝까지 박아 넣었다가 빼내길 몇 번, 그대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와 거친 숨만이 한 뼘만 한 방 안에 들어찼다. 해준은 몰려오는 사정감에 더욱 속도를 내 몰아붙였다. 더 참을 수 없을 때까지 허리를 움직이다 나오기 직전 빠르게 성기를 빼내고서는 허연 둔부에 그것을 문지른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같이 뿌연 액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해준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해준은 능숙하게 바지를 올려 입었다. 짝. 당연한 순서처럼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다. 무릎까지 내려간 바지를 추스르는 백기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백기는 문을 닫고 나갔다. 해준은 얼얼한 뺨을 문질렀다. 




**




새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끔찍한 추위에 발이 절로 굴러졌다. 언 손을 비비며 해준은 문이 닫힌 우체국 앞에 서 있었다. ‘강 씨, 일찍 가는 거야?’ 일도 거른  채 말이다. 하나뿐인 도시의 우체국은 이른 시각에도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해준은 점퍼를 단단히 여몄다.


“강해준입니다.” 제 입 밖으로 이름 석 자를 내어본 적이 얼마 만인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소포 더미에서 물건을 찾는 동안 해준은 초조함에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네, 하나 있네요. 강해준 씨. 해준은 직원이 건넨 봉투를 집어 점퍼 속으로 넣었다. 나오는 길에 그것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한다. 서울의 법원에서 날아온 그것. 해준은 백기가 있을 집을 향해 뛰었다. 



“백기 씨.”



문을 벌컥 열었다. 백기는 냉골 같은 바닥에 커다란 점퍼를 입고 웅크려 자고 있었다. 백기 씨, 일어나봐요. 해준이 그를 흔들어 깨우자 부스스 눈을 떴다. 해준이 건넨 서류를 받아든 백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




떠나기 전 찾은 곳은 역 앞의 중국집이었다. 해준은 백기의 손을 잡고 삐걱거리는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해준과 백기의 앞에 각각 자장면 한 그릇이 놓였다. 백기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자장면을 맛있게도 먹었다. 해준은 나무젓가락을 쥔 채 백기가 먹는 모양새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백기의 등 너머에 거울이 있는 것을 알아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낯설었다. 낡은 점퍼에 까치집을 한 머리, 푸석한 얼굴. 해준은 손을 들어 머리를 정리한다. 옆머리도 가지런히 빗어 다듬고 까슬한 턱도 매만진다. 면도 좀 해야겠는걸. 



기차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열차에 오르는 그들의 손에는 긴 여행을 다녀온 것치고는 단출한 짐이 들려있었다. 백기는 안쪽에 앉아 차창 너머의 낯익은 풍경을 보았다.  



“돌아가면 뭘 하고 싶습니까?”



백기는 풍경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카페를 차리고 싶어요. 과자도 직접 만들고, 빵도 굽고.” 

“가서도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해준은 백기의 손을 가만히 쥐어 잡았다. 백기는 해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대로 잠이 든다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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