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백기] # 未生 2015. 4. 18. 12:33


* 단문 모음



(1) AU



이별의 범주는 이별 후 슬픔을 위로를 받는 절차까지 포함하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을 위해 모였다는 이들이 헤어진 그보다 유난을 떠는지 백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헤어졌어. 한 마디에 자발적으로 장백기의 위로연(을 가장한 술자리)를 연 이들은 과장된 이입을 해가며 예의 그 위로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들의 전 여자친구를 욕하기 위해서인지, 단순히 술을 마시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 싶어서인지 백기는 이 자리의 목적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구석에서 조용히 자작을 하는 처지였다. 달리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여자친구와의 이별이 자신에게 슬픈 이유는 더 이상 예쁜 음식점에 못 간다는 사실 하나였다. 헤어지자는 민정의 슬픈 얼굴보다 가보자던 라떼집이 먼저 아른거렸던 것을 보아, 분명 그랬다. 커피 한 잔 값만도 못했던 얄팍한 사랑. 장백기의 첫 번째 연애는 짧고도 무미했다.     


“야, 나 솔직히 쟤네 사귈 땐 말 못했는데 장백기가 훨씬 아깝다고 항상 생각했어. 외모는 말할 것도 없지.” 알아. 그리고 한 잔. “장백기는 과탑인데 걘 국장 받을 학점은 되냐?” 알아. 또 한 잔. “성격 봐. 어? 성격은…그래도 민정이보다는 백 배 낫지! 와하하하!”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했던가. 웩웩 슬픔을 나눠 받고 괴로워하는 동기에게 백기는 잠시 간 연민을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 쓰러진 그를 몇몇이 부축해 나갔다. 어수선해진 틈을 타 몇몇은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고 몇몇은 담배를 태우러 가겠노라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테이블엔 그와 석율만이 남았다. 백기는 석율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살다 보면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여자가 민정이 걔만 있냐. 너무 슬퍼하지 마, 짜샤.” 



괜찮아요. 백기의 목소리는 뱉은 문장만큼이나 덤덤했다. 석율은 빈 병을 치우고 술을 새로 주문했다. 더 마실래? 하는 물음에 백기는 다시 한 번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익숙히 제 잔에 술을 부어 넣으려는 석율의 손에서 백기는 병을 잡아챈다. 꼴꼴 소리를 내며 아슬하게 잔을 채운 투명한 액체가 위태롭게 넘실댔다. 석율은 그것을 들어 단번에 비웠다. 백기는 다시 잔을 채우며 그를 흘끗 보았다. 석율은 자리에 앉은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평소의 석율을 생각하면 상당히 낯선 모습이었는데, 그도 저처럼 위로 파티니 축하 파티니 하는 것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거였을까.



“형한테는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요?”

“그래, 인마. 형 좋은 게 뭐냐. 다 얘기해, 풀릴 때까지 얘기해.”

“저 사실 아무 느낌 없어요. 슬프지도 않고요. 전혀. 아쉽다거나 하는 마음도요. 이상하죠.”

“거, 늦게 오는 사람도 있어. 사고 후유증처럼.”

“사랑이라고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

“내내.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걔뿐만 아니라요.”



석율은 백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백기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연애라는 거 되게 시시하네요.”



시작도, 본편도요. 적어도 끝나는 순간엔 아플 줄 알았어요. 백기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옷 위로 마찰하는 섬유의 감촉, 그리고 손의 압력 외에는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저는 형이랑 얘기하는 게 더 좋아요. 형은 다른 사람이랑은 다른 것 같거든요.”

“…….”

“아세요? 저 형이랑 취향도 비슷해요. 저번에 저 데리고 갔던 맥줏집 있잖아요. 저 그런데 좋아하는데, 분위기도 좋고…….”    



석율의 귀에는 백기의 목소리가 공명음처럼 울리다 멀어졌다. 술기운 탓인가. 말소리에 집중하려해도 귓가엔 윙윙대는 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석율은 쫓아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이내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너 그거 반칙이야. 




석율은 백기의 동아리 선배였다. 홀로 동아리방을 지키던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 가입 신청서를 내밀던 기다란 신입생을 기억했다. 취미로 사진 가끔 찍으러 다녀요. 석율을 보며 환히 웃었던. 가고서도 그 동글동글한 글씨를 한참 보고 있었더랬다. 백기는 지난봄 동갑인 동기와 교제를 시작했다. 누가 더 아깝니 주변인들은 그해 처음으로 탄생한 커플을 두고 토론에 가까운 입방아를 찧어댔으나 객관적으로 봐도 둘은 꽤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십일을 채 넘기지 못했는데 이유는 흔히 말하는 성격 차이. 타고난 성정이 정반대였던 탓이었다. 민정은 맞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백기에게 매번 불만을 표했고 그에 백기는 고치겠다는 제스쳐는커녕 슬슬 민정을 피해 다니기만 했다.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술자리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홀로 구석에 앉은 백기를 보기 전까지는. 구부러진 등을 발견하자마자 송곳으로 쑤신 듯 석율은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취한 백기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낸 뒤 석율은 터벅터벅 걸어 기숙사에 돌아온다. 어두운 방 안에 네모난 랩탑 화면만이 빛을 냈다. 그가 메모리를 꽂자 화면 가득 파일들이 나타났다. 지난 출사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 석율은 마우스를 움직여 사진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꽃, 너, 너, 꽃과 너. 딸각거리며 사진을 넘기던 석율은 한 사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사진은 곧 자신의 휴대폰 속으로 전송되어 화면을 가득 차지했다.








(2)



상자 안 가득 담겨있는 캡슐들 사이로 하얀 손가락이 방황했다. 달그락거리는 플라스틱 사이로 유영하던 손가락이 졸음에 강력해 보이는 검은 캡슐을 집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백기는 기계음이 멈추자 캡슐을 하나 더 넣었다. 졸졸 떨어지는 커피 줄기를 보다가 그새 또 졸 뻔하여 부르르 몸을 떠는데, 때마침 영이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오늘도 야근이에요?”

“죽겠어요. 끝이 안 나네요.”

“백기 씨 입에서 죽겠다는 말 나올 정도면, 진짜 장난 아닌가 봐요. 며칠째예요?”  

“글쎄요. 오늘은 들어가려고요.”



백기는 속으로 셈을 했다. 나흘, 아니 닷새째인가. 계속되는 철야 작업에 백기는 종일 비몽사몽 한 상태였다. 입시 시절에도 이렇게 오래 밤을 새워 본 적은 없었는데. 시차에 맞춰 연락하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며 새벽까지 깨어있다가 일을 마치면 지하 헬스장의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당직실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는 식이었다. 어제 여벌의 셔츠와 바지를 가지러 집에 들렀을 때 침대에 그대로 벌러덩 누워 버리고 싶은 것을 그는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아까 16층 갔다가 석율 씨 짐 싸는 거 봤는데, 마음이 영 안 좋더라구요.” 

“...?”



짐이요? 되려 묻는 백기에 영이는 순간적으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석율 씨가 얘기 안 했어요?” 얻어맞은 것처럼 퍼뜩 잠이 깬다. 백기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질주했다. 



‘아, 백기 씨 그때 야근 때문에 못 왔구나. 석율 씨 전출 신청했대요, 울산으로. 집에서 다닐 건가 봐요. 백기 씨한테는 따로 얘기하겠다고 했는데 바빠서 못했나 보네요.'



서른 개 남짓한 계단을 한 번에 세 개씩 오르는 동안 수 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지났다. 16층 비상구를 벌컥 열었을 때 복도에는 이미 미등만이 켜져 있어, 백기는 반쯤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사무실은 비어있는 자리가 대부분이었다. 백기는 차례로 칸을 세며 석율의 자리를 찾았다. 이쯤이었는데. 석율은 매일 같이 백기의 자리를 찾았으나 반대로 그가 석율의 자리를 찾은 적은 손에 꼽았다. 백기는 불룩 튀어나온 등 앞에 멈춰 섰다. 석율은 책상 아래서 얽혀있는 코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은 이미 텅 빈 상태였다. 빈 책상 위에 덜렁 놓여 있는 상자 안에는 칫솔, 달력 따위의 것들이 들어있었다.      



“어어 장백기! 내려가려고 했는데 잘됐네. 잘 왔어. 이리와.”



석율은 환한 얼굴로 백기를 맞더니 곧 안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상자를 뒤적였다. “장백기한테 줄 게 있었지.”



“어쩜 그래요.”



백기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나왔다. 과자가 붙은 카드를 찾은 석율이 그것을 백기에게 건넸다가, 그가 받지 않자 조용히 책상에 놓았다. “백기 씨.”  



“어떻게 그래요, 사람이.”

“앉을래?”



석율은 의자를 끌어와 앉으라는 신호로 쿠션을 가볍게 쳤다. 백기는 석율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의자에 앉았다.



“미리 말 못해서 미안. 일단, 바빴잖아. 너도나도. 그랬잖아. 요즘 한창...”

“설마, 나 때문이에요?”

“아니. 맹세코, 아니.”



석율은 짐짓 얼굴을 굳히고 부정했다. “나 진짜 사정이 있어서 가는 거야. 백기 씨 피해서 가는 거 아냐.”



“여기 오기도 전부터 현장 일 하고 싶어 했던 거 알잖아. 그리고 이건 사적인 건데 장백기한테만 얘기하는 거야. 요즘 울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그렇다고 많이 안 좋은 건 아니니 걱정하진 말고. 계실 때 같이 있자는 마음이야. 뭐, 그 밖에도 성 대리 보기 싫은 것도 있고 이유야 여러 가지..”



석율은 문득 하던 말을 멈췄다.



“…울어?”



울먹울먹하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진다. 석율은 당황했다. 장백기. 장백기가 울어버리면 내가 엄청 잘못한 것 같고 그렇잖아. 물론 미리 말 안 한 건 잘못한 거 맞지만, 그리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 터진 눈물은 쉴 새 없이 백기의 양쪽 볼에 길을 냈다.       



“안 가면… 안 돼요?”

“으이그. 하나밖에 없는 동기 형님 간다니까 속상해서 그래? 그래애? 참, 그래는 없지. 갔지. 이제 안영이랑 둘뿐인데 둘이 잘 의지하면서 지내고. 건강하고.”

“가지 마요, 가지 마요.”

“나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했는데? 한석율 사원 안가면 공장이 안 돌아가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가며 백기를 달래보려 하는데 백기는 끅끅대는 소리까지 내가며 서럽게 울었다. 어쩔 수 없네. 석율은 백기를 가볍게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그만의 특급 치료제. 조카들이 울 때 쓰는 방법이었다. 울음이 멎을 때까지 부드럽게. 아주 애기네 애기. 내가 애를 달래고 있어.



“아예 가는 거 아닌데. 서울에 금송아지 숨겨놔서 확인하러 자주 올 건데.”

“좋아해요. 나도 좋아한다구요. 얘기, 하려고, 했는데.”



왜. 말할 기회도 안 주고 가요……. 등을 쓸던 손이 뚝 멈추었다. 어깨 뒤의 고백에 석율은 쓰게 웃었다. 




**




집은 이미 비웠다고 했다. 석율은 곧장 울산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고 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까맣게 모를 수 있었을까. 결국엔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건 백기 자신이 되었다. 건물을 나선 석율은 까마득한 마천루를 올려다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이제 여기도 안녕이네. 중얼거리는 석율의 손에는 달랑 브리프 케이스 하나가 들려있었다. 영락없이 퇴근하는 모양새여서, 백기는 이대로 그와 헤어져도 내일 다시 그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커피 마시러 들어간 탕비실에서 유쾌하게 손을 흔들고 퇴근길에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섬유팀 한석율을.



“가. 피곤하겠다. 얼굴 많이 상했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백기는 그것을 타지 않았다. 저거 타야되는 거 아니야? 백기는 석율의 말에 아랑곳 않고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석율이 어? 어? 하는 순간 버스는 떠났다. 


그가 석율을 데리고 간 곳은 기차역이었다. 두 사람은 기다란 플라스틱 의자에 말없이 앉아 캔커피를 나눠 마셨다. 



“누가 봤으면 나 회사 잘려서 나가는 줄 알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는 건 오버였어.”



석율은 백기를 보며 코를 찡긋했다. 백기의 얼굴엔 아직도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석율은 손을 들어 잔상처럼 남은 자국을 문질렀다.


전광판에 붉은 글씨가 떴을 때, 석율이 먼저 일어섰다. 백기도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켰다. 이제 정말 마지막. 석율은 백기의 귀 옆에 가까이 왔다가, 그의 말을 듣고 멍해진 백기를 가볍게 안고 플랫폼으로 들어가버렸다. 석율은 안에서 연신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갖다 대다가 양손을 흔들었다. 그때까지도 백기는 석율의 말을 되뇌고 있었다.



‘아까 그 고백은 받아줄게.’ 








(3) AU



이건 내가 경북의 한 작은 마을에서 공보의로 있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전공의 시절 나에게는 말버릇이 하나 있었다. ‘난 개원할 거야.’ 이 말에 내가 내 명의로 물려받을 아파트가 세 채쯤 있는 부잣집 도련님인 줄로 아는 이도 있었지만, 실제론 부모님은 정년을 앞둔 평범한 현직 교사였고 우리 집은 세 식구가 사는 주택 한 채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시간, 매 순간 개원을 결심했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오고 싶었던 이유 중 팔 할은 마주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강 교수 때문이었다. 강 교수는 이유 없이 나를 미워했다. 일부러 지켜보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할 성싶으면 다가와 꼬투리를 잡아대기 일쑤였다. 강 교수는 나를 혼낼 때 주변에 환자건 보호자건, 동료들이 있건 상관하지 않았다. 주변 인턴들의 부러움을 샀던 불과 1년 전이 그리워 나는 밤마다 과를 옮기는 꿈을 꾸었다. 내가 해온 것들에 대한 보상이 당연했던 그곳으로. 결국 임상 과정을 마치자마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을 나왔다. 그날 주차장에서 우연히 강 교수 차를 발견했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렁였으나 사람 앞일 장담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만으로 그쳤다. 


그 후로 곧장 의무를 위해 공보의에 지원했다. 집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지만 인생에 한 번쯤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곳 주민들, 공무원, 심지어 개들까지 모두 내게 친절했다. 4년 만에 비로소 찾아온 마음의 평화. 나는 곧 마을에서 친절한 장 선생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 다급히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집 밖으로 나갔던 날이었을 것이다. 문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 엄마, 그리고 그 등에 업힌 열이 끓는 아이. 야심한 밤이었고 나는 눈앞에서 어린 환자를 돌려보낼 만큼 냉혈한은 아니었다. 아이를 돌봐주었다는 소문은 마을 전체에 퍼져 내 좋았던 이미지에는 타당한 근거까지 더해지는 듯했다. 소문 덕에 종종 예고 없이 집에 찾아오는 이들 또한 있었으나 나는 귀찮은 티를 내지 않고 모두에게 성의껏 대했다. 이걸 가리켜 완벽한 적응이라고 하면 되겠다. 나는 옆집에서 부쳐준 파전을 먹으며 이대로 아예 눌러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소소하게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며칠 전부터 감기로 보건소에 드나드는 한 고등학생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가운데 가르마를 탄 단발머리의 아이는 첫눈에 보아도 인상에 깊었다. 진찰을 위해 상의를 걷게 하고 그 위로 청진기를 대면 고개를 숙이고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는 수줍은 아이. 순간에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겹쳐본다. 타지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와 그를 동경하는 순수한 여학생, 뜻밖의 계기로 시작하는 서툰 사랑. 하지만 환상은 환상일 뿐 현실의 그 애는 ‘남자’ 고등학생이었다. 그 애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나는 모른 척 손을 빼내고 처방전을 작성했다. 그리고 증상을 묻던 중 문득 맞닿은 시선에 움찔하고 만다. 그 애는 정말 나한테 반한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이제 정말로 당황하기 시작했으나 순간에도 웃음만은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 의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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