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Midnight Blue Flutter # 未生 2015. 5. 5. 17:52

Midnight Blue Flutter (AU)

해준백기




[ why do birds suddenly appear … ]



장부를 넘기며 흥얼거리는 남자는 누가 보아도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 just like me, they long to be close to you- ]



미영 씨도 퇴근했고, 애들 상태 다 확인했고, 저녁은 뭘 먹지. 백기는 대기실의 TV 채널을 돌리다 이내 전원을 껐다. 음악이 뚝 끊김과 동시에 안에는 침묵이 들어찼다. 백기는 이 고요함을 좋아했다.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 이 시각에 손님이 더 올 것 같지는 않고. 그럼 나도 슬슬 퇴근 준비를 해볼까. 


딸랑. 그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이크, 퇴근이라는 말을 내뱉기 무색하게 손님이다. 



“어서 오….” 



그리고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목 뒤로 서늘한 금속이 와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가늠한 백기는 손을 천천히 들었다. 



“문 닫고 불 전부 꺼.”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무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불가항력이었다. 총구는 자신을 향해 있었고 백기는 남자가 지시한 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병원의 등을 모두 내렸다. 남자는 목 뒤에 총을 겨눈 채로 백기를 어디론가로 걷게 했다. 백기는 떨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남자가 말하는 곳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떼었다. 손을 든 채로 떠밀려 온 곳은 다름 아닌 수술실이었다. “불 켜.” 백기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수술실이 밝아지자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두운 곳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옆구리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백기는 그제야 남자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는지 깨달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여기는…동물병원이고, 저는 수의사인데요.”

“그래서 문제 있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백기는 제 말이 도발이나 반항으로 들리지 않았길 바라며,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수술도구가 담긴 철제 그릇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봉합해.” 



백기는 장갑을 찾아 끼고 알콜 솜으로 손을 닦았다. 그런 후에는 도구들을 하나씩 닦으며 곁눈질로 남자의 인상착의를 보았다. 검은 정장에 넥타이. 조직 폭력배? …요원? 무엇이든 간에 여길 찾은 걸 보아 병원에 갈 수 없는 신분임은 분명했다. 


소독을 마친 백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상의를 벗고 셔츠를 올렸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상처는 꽤 깊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상처. 그것은 베였다기보다는 뚫렸다는 것에 가까웠다. 방탄복을 뚫을 만큼 무겁고 뾰족한 무기. 그게 무엇인지 백기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교전 중에 입은 내상이겠지. 백기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봉합했다.

남자는 수술 내내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힘을 주는지 이따금 근육이 수축하는 것 외에는 움직임조차 없어 백기는 남자가 기절한 건 아닌지 종종 올려다보아야 했다. 돌아온 건 머리 위를 겨누고 있는 총과 싸늘한 시선뿐이었지만 말이다.


마침내 끝까지 상처를 꿰맨 백기는 그의 옆구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총이 이마 위로 바짝 다가왔다. 챙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도구들이 떨어졌다. 백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순순히 손을 들고 있었다. 남자는 봉합한 상처를 내려다보다가 옷을 내리고 수술대에서 내려왔다. 어쩌면 백기는 이 영화의 엔딩을 알고 있었는지 몰랐다. 철저히 이용당하고 그다음엔. 빵.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요. 경찰에도 전화 안 하고 평생 저만 알게요. 아니, 오늘 일. 전부 잊어버릴게요.” 



백기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서 손을 모으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저 아직 결혼도 못 했고 집도 월세라 제가 죽으면 혼자 계신 어머니…. 퍽. 머리를 얻어맞은 백기는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으, 아, 아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남자는 사라진 후였다. 백기는 서둘러 문으로 달려갔다. 열린 문으로 밤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백기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거리는 개미 한 마리 없이 텅 비어있었다.




길 건너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백기는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검색창에 지역 이름을 적어 넣었다. 사람에게 그 정도의 큰 상처를 입힐 만큼의 소동이었으면 언론에 보도되었을 수도 있다.


[검색결과 : 없음]


근방에서 일어난 강도나 살인 사건은 없었다. 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백기는 노트북을 덮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뭐지, 그 사람. 총을 가지고 있었어. 백기는 전화기를 들었다. 11...까지 입력하다가 곧 내려놓았다. 하마터면 총에 맞을 뻔했고. 백기는 여즉 서늘한 뒷목을 쓸었다.    




**




“안녕. 얘들아.”



반갑게 짖어대는 입원장 안의 개들에게 인사를 하며, 백기는 진료실을 열었다. 불도 컴퓨터도 켤 의지 없이 백기는 의자를 끝까지 젖히고 누웠다. 긴장이 풀리니 졸음이 쏟아진다. 간밤엔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남자가 집으로 쫓아온다든지 하는 걱정은 없었으나 흔치 않은 일을 겪고서 숙면을 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려왔다. 백기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진료 개시까지는 아직도 삼십 분은 족히 남아 있었다. 뚜벅뚜벅 발소리는 진료실을 지나쳐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백기는 한 손엔 메스, 한 손엔 112가 눌린 전화기를 들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불이 꺼진 병원 안은 고요했다. 순간, 대기실 쪽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쪽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소리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어리둥절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소리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TV에서 나오는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불이 켜진 대기실엔 아무도 없었다. 백기는 별안간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급히 돌렸다.   



“선생님?”

“악, 아악!”

“선생님, 저예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미영 씨? 하아……. 하하. 이, 일찍 왔네요.” 



등 뒤로 메스를 숨기며 백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전부터 예약이 있어서요. 짱이네 아시죠? 끝나면 진료도 같이 봐주셔야 할 거예요.”

“……네. 알겠어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 네, 네. 그럼요.”

“커피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일 봐요.”



백기는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아래에 메스를 내려두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과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백기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이래서야 불안해서 살 수 없다. 백기는 흥건한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확실히 자신은, 겁에 질려 있었다. 




**



그 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때때로 악몽을 꾸곤 했으나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맑아진 정신은 그를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드물지만, 살다 보면 나쁜 일을 만나기도 하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일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고 스쳐 지나가는 악몽일 뿐이었다. 깨면 그만인 나쁜 꿈. 그 일로 자신이 황폐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얻은 게 있는데 보안에 신경을 더 쓸 수 있게 됐…….  


열쇠를 꽂은 백기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천천히 문을 밀었다. 유리문이 맥없이 밀려났다. …문이 열려 있다. 안쪽엔 불도 켜져 있지 않고. 백기는 조심스레 보조문을 열며 말했다.



“미영…씨? 안에 있어요?”


“미영 씨. 맞죠?”



툭. 들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진료실 책상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것 좀 제거해줘야겠는데.”



그 남자였다.


그날의, 그 남자. 총은 없었다. 그럼에도 백기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도로 문을 잠그고 돌아왔다. 남자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백기에게 앉으라는 듯 의자 쪽으로 눈짓했다. 백기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셔츠를 벗었다. 그가 제거해달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아문 상처의 실밥이었다. 그간 드레싱을 꼼꼼하게 했는지, 수술 부위에 염증이 없었다. 이 정도의 섬세함이면 실밥을 제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그저 백기는 이 자가 돌아온 것이 원망스러웠다. 수없이 걱정했음에도 설마 다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당당히도. 남자를 다시 마주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백기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상처에 가위를 댔다. 채 아물지 못한 곳에서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행위 내내 남자는 말이 없었다. 백기는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며 한 뜸 한 뜸 자리잡은 실을 뽑아냈다. 어쩐지 눈에 들어오는 건 꿈틀거리는 복근이라든지 불거진 핏줄이라든지 저와는 관련 없는 것들이었지만.



“당신. 귀엽네.”

“…….”

“그걸로 옷이나 찢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



움찔한 백기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서 실을 잘라내는 데 집중했다. 아마도 책상 밑에 있는 메스에 대한 이야기일 터였다. 자신이 겁내고 있다는 걸 인정한 후로 그는 경계심이 부쩍 늘었다.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보안 업체를 고용해 병원에 카메라를 달고 경보기를 설치하는 거였으니. 물론 이 자가 아무렇지 않게 병원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니 쓸모없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해코지를 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면 맞설 계획이었다, 계획이었으나… 부질  없는 짓임을 방금 깨달은 차였다. 



“다…됐습니다.”



백기는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옆구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남자가 손바닥을 펴고 팔을 들었다. 백기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툭툭, 잘했다는 듯 볼을 두들기는 거친 손바닥이 살갗에 와 닿았다. 백기는 감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상황을 살피려 실눈을 떴을 때는 남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백기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방을 나가 남자가 완전히 갔는지 확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백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머그잔을 쥐었다. 책상 위에는 낯선 로고가 박힌 하얀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백기는 컵을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한 눈에도 셈이 되지 않는 현금다발이 들어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백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




<진료는 쉽니다. 5.5~5.10>



“이사, 이사를 가야 해. 병원 내놓고, 집도 내놓고. 그래. 다른 곳으로 가서 새 시작을 하는 거야, 장백기.”



백기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터를 잡고, 단골을 확보하고, 함께하는 직원을 고용하기까지 모두 3년. 이 모든 건 3년간 그가 휴일 없이 일해온 대가였다. 병원은 규모는 작을지라도 내실이 있었고 내년쯤엔 목돈으로 확장을 할 계획이었다. 한 주간에 걸쳐 자신에게 일어난 이 기묘한 일들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백기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선량하고 평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야옹-’ 고양이 까미가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평화로운 곳으로 떠나는 거야, 까미야.”



야옹. 까미가 대답하듯 울었다. 그때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백기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뛰어 숨었다.




경찰 배지를 보이며 자신을 형사라 소개한 남자는 강력계 형사치고는 작은 체구와 온순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수사 협조 요청 차 방문했습니다. 선생님께 여쭐 게 있는데, 병원 문이 닫혀있더군요.”

“수사라니 무슨…….”

“지난주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목격자를 찾고 있습니다.”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백기는 현관을 열어 형사와 경찰들을 안으로 들였다. 



“CCTV를 확인해봤을 때, 용의자는 선생님의 병원 근처 100M 반경에서 사라졌습니다. 손님이나, 주민에게 혹시 들으신 게 없으십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용의자는 현장에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형사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으며 말했다. 백기는 그날 병원 바닥과 수술실에 떨어진 남자의 피를 치웠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형사를 맞이한 게 어쩌면 다행이라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낯선 사람이나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방으로 들어가면 밖의 상황은 거의 보이지 않아서요. 죄송하지만 더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알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제 뒤에 있는 사내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백기의 양팔을 붙들었다.  



“자, 자, 잠깐만요. 뭐하시는 거죠?”



형사가 건너편 남자에게 넘겨받은 봉투를 흔들었다.



“이래도 강해준 모른다고 발뺌할 건가? 응?”



백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날 남자가 놓고 간 돈 봉투. 안에 든 돈만 꺼내서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다. 봉투는 당연히 버렸고. 그것을 휴지통에서 찾아낸 모양이었다. 잠깐, 집을 뒤졌어?



“데리고 가.”



수상했다. 목격자를 찾는다면서 집을 뒤지고 이런 식으로 연행을, 그때 백기는 형사라는 남자의 허리춤에서 반짝이는 은색 권총을 발견했다.



“잠시만요. 당신들 경찰 아니죠. 신고하기 전에 이 손 떼요.”

“흠…. 어쩔 수 없군.”

“아, 안돼! 뭐, 뭐하는, 안돼! 읍!”



시야가 차단되는 동시에 백기의 머리 위로 검은 천이 씌워졌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아, 쪽지 시험 커닝한 적이 있었지. 한 번, 아니 실은… 네 번.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에게 새벽까지 놀았던 걸 거짓말한 적도. 그래, 무단횡단도 여러 번 했지. 차가 없으면 지금도 신호위반을 해. 담배꽁초를 길에 버린 적도 있었고. 나 되게 잘못한 거 많구나. 그런데 이렇게 결박당해 납치당할 만큼 잘못한 것들이었나. 


나 장백기. 서른두 살. 애인 없음. 죽음을 앞두고 있다. 손이 뒤로 묶이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동차에 밀어 넣어졌으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 동승한 남자들은 때때로 무전을 한다. 추측건대 내가 치료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 아마도 그들은 내가 모르는 것까지 말하도록 강요하고, 고문하고, 결국 죽일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두려움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차가 멈춰 섰다. 백기는 남자들에 의해 끌려 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한 번, 코너가 있는 복도를 몇 번 돌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팔이 놓여졌다. 백기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얼굴에 쓰인 천이 휙 하고 벗겨졌다.



“……아?”



쏟아진 빛에 눈을 끔벅거리던 백기는 익숙한 얼굴에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제 앞에 선 남자는 다름 아닌… ‘그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정중히 의사를 묻고 제 발로 오도록 하라고 말했을 텐데.”

“경찰과의 접선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협상은 제 전공이 아닙니다. 이런 건에는 한석율을 보내셨어야죠.”



사내가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더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턱짓을 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 백기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지만 이런 식의 침묵은 원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수많은 액자와 창가에 일렬로 늘어선 화분이 방 주인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무실 같았다. 이 남자와 자신만 빼고서는.



“안경이 고장 났군. 하나 새로 맞춰주도록 하지.”



남자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백기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뻗어지는 손에 백기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으나 그가 더 빨랐다. 남자는 휜 안경을 맞춰보려는 듯 이리저리 만졌지만, 안경테는 얼마 못 가 그의 손에서 뚝 부러지고 말았다. 



“당신… 누구신데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남자는 부러진 안경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백기에게 다가갔다. “왜…냐고.” 백기는 주저앉은 채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명백한 방어의 표현임에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검은 구둣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등에 딱딱한 벽이 닿자 백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백기와 시선을 맞췄다. 백기는 그 차가운 눈동자에 또다시 얼어야 했다.



“네가 필요해. 장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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