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백기]| # 未生 2015. 5. 22. 01:36
* 단문 모음
(1)
“야 이 새끼 그린 것 봐.”
“공부하는 줄 알았더니 순 변태 짓 하고 있었네.”
백기의 책상을 둘러싼 두 놈이 공책을 펄럭이며 넘기고 있었다. 청소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실로 돌아온 백기는 자신의 책상 위에 앉은 채 익숙한 노트를 들여다보는 이들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아뿔싸. 연습장을 서랍에 넣는다는 걸 잠깐 비운다고 잊었다. 굳어진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가 부러 인기척을 냈으나, 주먹깨나 쓴다고 겁내는 것 하나 없는 놈들은 재밌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돌아온 주인을 조소로 맞이했다.
“이리 줘.”
왁자지껄한 교실 안은 각자 저들의 볼일로 바빠 보였지만, 몇몇은 관심을 가지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백기는 곧 돌아올 보충시간을 소란스럽게 시작하길 원치 않았다. 회유하듯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
“남자 거밖에 없네. 재미없게. 너 혹시, 호모냐?”
돌려줄 생각이 없는지 놈은 백기 앞에서 남자의 성기가 분명한 그림을 뒤집어 가리켰다. 호모. 주둥이를 통해 튀어나온 어조만큼이나 눈에는 경멸과 혐오, 그리고 저급한 우월감이 담겨있었다. 본 적이 있는 눈이다.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백기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호의를 착각한 순간 배려는 끝이 났다. 책상에 걸터앉은 놈을 세게 밀었다. 놈은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책상 두 어개와 같이 넘어져 우당탕 큰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한 듯했다. 놈의 손을 떠난 공책은 교탁 근처로 날아가 페이지 가득 빽빽이 채운 성기 그림을 활짝 펼쳤다. 숨죽은 웃음이 여기저기에서 단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백기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놈을 지나쳐 떨어진 공책을 주워들었다.
퍽. 퍽.
“억. 으, 으윽.”
하교하던 중 팔을 잡혀 소각장 사각지대로 끌려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 치고 선생이 들어왔으나 두고 보자는 놈들의 눈초리는 등 뒤로 따갑게 꽂혀왔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피할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개 패듯 맞을 줄은 차마, 억, 몸부림치며 반항을 하자 배로 주먹이 날아왔고 슬프게도 그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눈앞이 아득해질 때까지 맞았다. 반장이라고. 봐줄 줄. 알았냐. 어절마다 하복부에 날아오는 주먹과 발길질에 백기는 앓는 소리만 삼켜냈다. 이제는 일어날 힘조차 없어, 백기는 빙글빙글 도는 하늘을 뜨이지 않는 눈으로 힘겹게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백기가 일어나지 않자 두 놈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를 번갈아 밟았다.
놈들이 바닥에 침과 욕설을 뱉고 소각장을 떠났을 때, 비로소 백기는 몸을 일으켜 맞은 곳을 살폈다. 목 아래로는 시퍼런 멍이 흐린 먹처럼 번져 있었다. 주름 하나 없던 흰 셔츠에는 발자국이 떡 하니 찍혔다. 이 꼴로 학원에 갈 순 없다. 백기는 처박힌 가방을 들어 올렸다. 채인 옆구리가 욱신댔다. 잠깐, 그러고 보니 안경. 안경이 없는데…….
쑥. 그때 흐릿한 시야로 안경이 내밀어졌다. 백기는 안경을 받아드는 대신 고개를 들어 제 앞에 드리워진 인영을 확인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특기생이라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하는 게 바둑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름만은 선명한. 아마 제 앞번호를 가진 이유일 터였다. 안경을 쥔 장그래는 출석부에 꽂힌 증명사진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백기는 그의 손에서 안경을 낚아채며 모나게 말했다. 그래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이 달싹였으나 곧 그의 도톰한 입술은 아래위로 꾹 다물렸다. 백기는 엉망이 된 교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를 애써 무시하며 어깨에 가방을 메었다. 어깨를 제대로 쓰지 못한 탓에 끈이 방황한 채 팔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래는 가방끈을 백기의 어깨에 바로 메어주었다. 백기는 손대지 말라는 듯 인상을 쓰고 돌아보았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기는 뒤를 돌았다. 절뚝이며 걷는 그는 이제 다른 곳이 욱신대는 것만 같았다.
(2)
‘뭘 어떻게 해도 절대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네요.’
‘장백기?’
‘…….’
‘한 발 가까워졌다 싶으면 두 발 멀어져 있고. 그렇게 도돌이표인 사람, 있지.’
한발 다가가면 두 발을 뒷걸음치는 사람. 불과 반 년 전 까지만 해도 장그래에게 장백기는 그런 존재였다. 유독 자신에게 심하긴 했지만 거리를 두는 건 백기의 타고난 성정이었다. 역할이 아닌 사람 대 사람의 진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 그에 대한 무지가 약점으로 보이지 않을까 방어기제를 발동시키는 것이다. 수 백 개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도 막상 저에게선 반경 1m의 선을 빙 긋는 사내. 깨달은 건 위의 대화로부터 멀지 않은 때였다.
모든 악보에는 마지막 장이 존재한다. 연주를 마치고 악보를 덮으면, 그때부터는 즉흥 연주가 시작된다. 이제 그는 다가가지 않아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손을 내어주면 기꺼이 달아오른 볼을 부벼올.
“우리 동갑인데 말 놓자.”
“네. 그럽시다. 아니, 그러자.”
“그래. 그래 씨.”
백기는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빨대로 휘저으며 소년처럼 웃었다. 단정한 얼굴과는 사뭇 다른, 때론 이질적이기까지 한 명랑한 톤이 그와 제법 어울린다고 그래는 생각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반무테 안경과 긴장으로 굳은 표정을 한 꺼풀 벗겨내면 백기는 의외로 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한 것으로 그와 한결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는지 백기는 신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는 백기의 이런 면모가 좋았는지도 몰랐다.
마침 은은한 재즈가 흘러나와 그래는 기분 좋게 발로 박자를 맞추었다. 점심이 훌쩍 지난 시간이라고 해도 카페 안에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가게라고는 하나, 상권이 전부 근방의 사무실을 대상으로 한 탓이었다. 주말에는 이렇게 텅 비어있어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으면 백기가 랩탑을 들고 부러 찾기도 했다.
“어때. 거긴 다닐만해?”
“영업팀에 있을 때보다 훨씬. 바빠.”
“아는 선배가 스타트업 몇 년 전에 시작해서 지금 겨우 자리 잡았다고 했거든. 초반엔 일주일에 한 번 집에 갔다고 하더라고. 이상은 그 정도는 아니지?”
“다행히 출퇴근은 해. 사무실에 간이침대는 있는데 앞으로 쓸 일이 있을지도.”
“매일은 아니어도 우리… 자주 볼 수 있는 거지?”
“응.”
미소를 지으며 그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백기는 그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는가 싶더니 원형 테이블을 가로질러 다가온다. 너른 자리들을 두고 굳이 구석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금세 입을 떼고 뿌듯한 얼굴을 하는 그가 귀여워 그래는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왜? 별로…였어?”
“아니. 우리 나가서 걸을까?”
잔을 내려놓은 그래가 먼저 일어섰다. 큰 보폭으로 문을 나서는 그래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다 백기는 뒤늦게 재킷을 들고 그를 쫓았다.
“솔직히 말하면 남자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여자도 아닌데 여자처럼 대할 수도 없고, 친구는 더더욱 아닌데 친구처럼 대할 수도 없는 것이고. 백기는 그것이 꽤 불만이라는 듯 장난스레 입을 내밀고 말했다. 장그래는 장백기에게 해설 없는 문제 같았다. 한 줄짜리라 만만히 보고 덤볐다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조차 몰라 주저앉고 마는.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수수께기가 그의 손에 들려 왔다. 장그래는 또한 심해와 같았다. 그의 상상보다도 훨씬 깊고, 볼 수 없어 어두웠다. 백기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 큰 이였다. 어쩌면 그의 마음을 끌었던 것도 우연한 기회 따위의 것이 아닌지 모르는 일이었다.
녹음이 짙은 공원은 곧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와 백기는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친구도 여자도 아닌 남자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는 거란 말이지.”
“…….”
“답이 없는 선택지를 본 적 있어?”
“제법 많아.”
“…….”
“나는. 백기 씨가 마음 가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음?”
“마음 가는 대로.”
얼굴을 양손으로 잡히자 흡 하고 코 아래의 숨을 참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꺾어 깊게 입을 맞췄다. 좀 더, 조금만 더 가까이. 혀가 얽혀들어 오는 대담한 키스에 백기는 결국 손에 든 플라스틱 컵을 놓치고 말았다. 쏟아져나온 얼음 위로 작은 이파리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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