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파안 # 未生 2015. 6. 13. 23:12

破顔 (AU)

해준백기




“인사해라. 네 형이다.”



열여덟 인생을 외동으로 자라온 사람에게 난데없이 네게 형제가 있다고 하며, 낯선 이를 형이라 소개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옷 차림의 백기는 검은 상복을 입은 거실의 남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그래’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소개한 남자는 모두가 잠들어있던 주말 아침, 현관 벨 소리로 정적을 깨었다. 혈혈단신으로 편지와 낡은 반지를 가지고 나타난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래의 친모는 혼외 처라 했으나, 엄밀히 그녀는 부모의 혼인 전에 만난 상대였다. 백기의 부는 당시 그녀가 임신을 했는지 꿈에도 몰랐다 했다. 그래는 서울 외곽의 한 산부인과에서 백기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반겨주는 이 하나 없이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백기의 부는 그래의 손을 잡으며 자신을 찾아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 이젠 장그래구나.”



반면 그래가 온 후로부터 백기의 얼굴은 내내 어두웠다. ‘왜 이제야?’ 이것이 첫 의문이었다. 새로운 형제를 갖기에 백기 자신은 이미 너무나도 커버렸다. 아비 없이 자란 그래를 안쓰러이 여겨 거둔 거라 아버지는 말했지만 그런 관점이라면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을 겪은 백기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는 그의 친모를 빼다 박았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녀가 생각난다며,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그래를 앉혀 놓고서는 그녀의 생전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의 조심스러운 한 마디 한 마디에 아버지는 귀를 기울였고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야기가 시작될 낌새만 보여도 백기는 그릇에 코를 박고선 풀어야 할 수학문제들을 떠올렸지만 말이다. 


하루아침에 이복형이 생겼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백기는 이것이 악몽이 아님을 깨우쳐야 했다. 그래는 저보다 왜소했고 그렇다고 하여 특출한 능력도 없어 보였다. ‘왜 저런 놈을?’ 그로부터 쭉 가지게 된 백기의 두 번째 의문이었다. 전입신고와 함께 전학 수속 또한 빠르게 이루어졌다. 우연하게도 같은 반에 배정되어 학교에서까지 매일 얼굴을 보는 처지가 되었다. 그중 다행으로 특기생인 탓에 그래는 프로가 되기 전까지 수업 일수만 겨우 채우는 식이라 했다.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백기는 등교 첫날부터 으름장을 놓았다. 학교에선 아는 척하지 말라며. 그래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가는 백기의 등을 보며 쓰게 웃었다. 집에서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데 학교에서라고 살갑게 대할 리 없었던 것이다. 






“와. 바둑이라고? 대박, 대박. 멋있다.”

“멋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바둑은 둘 줄 모르는데 알까기는 자신 있거든. 알까기 할 줄 알아?”

“아니. 그게.. 뭐야?”



석율이 지나가던 길을 막고 그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가 전학을 온 지는 일주일이 다 되어갔지만 석율 또한 오랜만에 학교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가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면 석율이 다른 질문을 던져 그것을 막았다. 수업 시작 벨이 울렸다. 그래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석율의 질문공세에 슬슬 지쳐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답변 같은 단답만을 대강 던져내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어? 여태까지 어디 섬 같은 데서 수련했던 거야?”

“◇◇구.”

“엥? ◇◇구면 여기서 멀지 않은데 전학까지? 지금은 어디 살아?”



그때 그래가 백기 쪽을 흘끔 보았다. 제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왜 나를 보고 난리야. 눈치가 빠른 석율은 그들 간의 미묘한 기류를 금세 알아채곤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래는 가까워진 석율의 얼굴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석율이 한 발 빨랐다. 석율이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말했다. 



“이건 들은 건데, 혹시 너 정말 장백기랑…….”

“자리에 앉아라.”



타이밍 좋게도 담임인 해준이 교실에 들어와 그래는 석율을 재빨리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백기는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고 백기와 눈이 마주친 석율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프로 데뷔는 형편이 어려워 포기하려던 차였다고 했다.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진 시기와 맞물려 후원금을 병원비로 다 써버린 탓이었다. 그래는 연구생 사이에서도 실력이 가장 뛰어나, 금년 데뷔에 가장 유력하다고 했다. “좋은 재능을 썩힐 순 없지.” 아버지는 아낌없이 그래의 바둑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백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또한 전교에서 성적으론 한 손가락 안에 꼽는 수재였지만 아버지로부터는 격려나 칭찬 따위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내에선 금연이야.”



해준이 백기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으며 말했다. 해준이 기척 없이 옥상에 올라온 것도 선생인 그에게 담배를 들킨 것에도 백기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려 하자 해준이 손목을 잡아 막았다.



“난 널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고 결코 그걸 저버리지 않을 거야.”



벡기는 순순히 손목의 힘을 풀었다. 해준은 연기가 나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발로 끄트머리를 밟아 불을 껐다. 백기는 먼지 쌓인 환풍기를 등에 기대고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주소가 같더라. 물어보니 네 형이라던데, 왜 미리 얘기하지 않았어?” 

“…….”

“너랑 닮은 데가 한 군데도 없어서 더욱 의외였지. 신기해. 그래도 반은 같은 피일 텐데 말이야.”

“…….”

“예의도 바르고, 특기생치고 성적도 괜찮고. 바둑도 아주 잘 둔다고 김 선생이 놀라던데.”

“장그래 이야기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네 형이잖아. 생사도 모르던 형제 이제라도 알게 돼서 좋지 않아?”

“걔가 왜 내 형이에요?”

“…….”

“전 18년을 혼자 자라왔어요. 제가 당연하게 누려야 할 걸 나눌 필요가 없었다구요. 그 자식이 더이상 제 것을 빼앗지 못하게 할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캉한 입술이 불쑥 맞닿아왔다. 곧장 혀가 얽어 들어왔고 백기는 답이라도 하듯 해준의 목을 끌어안아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넌 안달 내 할 때 귀엽더라. 고딩같고. 응?”



다시 뚱해진 표정의 백기를 보다가 결 좋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 번 흩트리곤 해준은 옥상을 빠져나갔다. 백기는 해준이 나갈 때까지 기다린 후에 기다란 담배를 빼어 물고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인영이 있었다. 그래였다. 멀뚱히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를 지나쳐 백기는 가방을 뒤져 카드키를 찾았다. 



“열쇠가 없어서. 벨 눌러도 아무도 없는 것 같길래.”



카드를 대자 안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백기가 문을 열고 집안으로 성큼 들어가자 그래가 닫히려는 문을 잡고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저기. 백기야.”



교복을 갈아입는 중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와 백기가 몸을 황급히 가렸다. 



“너는 노크하는 법도 안 배웠냐?”

“미안. 문이 열려있길래.”



백기는 티셔츠를 급히 몸에 꿰어 넣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어. 이거.”



쇼핑백에는 백기의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지난 주말 그의 집에서 갈아입었던 옷을 보내온 것이었다. 백기는 내용물을 대충 확인하더니 그것을 침대맡에 던져두었다. 여즉 문앞에 그래가 서성이고 있어 백기는 안 나가냐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래는 멋쩍게 웃으며 나가려다 다시 몸을 돌려 백기를 보았다.



“그거 네 옷이지? 선생님이 왜 네 옷을…….”

“장그래.”

“…….”

“오지랖 좀 그만 부려. 오지랖도 도를 넘으면 병이야.”

“…….”

“…….”

“응. 알았어.”



그래는 다시금 옅은 미소를 짓고 백기의 방을 나갔다. 찰칵 문이 닫히자마자 백기는 휴대폰을 들었다.


[선생님. 어디예요?]






“술 마셨어요?”



학교 근처에서 회식을 했는지 해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네에 앉았다. 어쩐지 먼저 이쪽으로 오겠다 하더라니. 



“왜 불렀어?”

“아, 그게요 선생님. 제 옷, 왜…….”

“응?”

“…아니에요.”



왜 장그래에게 옷을 보냈냐고 물으려다 멍청한 질문인 것 같아 백기는 입을 다시 다물었다. 일찍 하교를 해버린 저를 대신해 같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 들려 보낸 거라면 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그넷줄만 만지작거렸다. 날이 흐리다 싶더니 기어코 빗방울이 하나둘 어깨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비 온다.”



해준은 그네에서 일어나는 백기의 손목을 잡았다. 해준은 보기 드물게 열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기야. 오늘 집 비는 날이지?”






신발도 벗기 전 잡아먹을 듯이 물어오는 입술에 백기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와중에도 그래가 집에 있다는 걸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이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문소리를 듣고 나온 그림자가 움찔하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백기는 오히려 그가 알아두기를 바랐다. 내 것이니 손댈 생각 말라고. 


입술을 뗀 해준이 숨을 골랐다. 밝은 등 아래서 본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도 붉었다. 그제야 싸한 알콜 향이 입안에 맴도는 것도 같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좋았다. 백기는 해준의 팔을 잡고 제 방으로 이끌었다.



“아, 아으, 선생…님. 천천히.”



술을 마신 해준은 평소보다 과감했다. 침대에 백기를 눕히자마자 얇은 면바지와 속옷을 함께 끌어내고 백기의 것을 입에 담았다. 중심에 감아오는 뜨겁고 축축한 혀에 백기는 가감 없이 소리를 냈다. 



“하아…. 좋아, 좋아요. 선생님. 넣, 어주세요.”



해준은 책상 위를 더듬어 핸드크림을 손가락에 짜낸 후 백기의 뒤에 밀어 넣었다. 고통에 찬 신음이 크게 튀어나오며 동시에 그의 허리가 들썩였다. 아래로 빠르게 드나드는 손가락의 느낌이 생생했다. 내벽을 긁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빠져나가자 신음을 내던 백기는 누운 채로 숨만 헐떡였다. 무릎을 접어 자세를 고치는 백기를 두고 해준은 지갑에서 콘돔을 꺼냈다. 백기는 그 순간에 번뜩이는 안광을 마주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는 빛나는 눈자위. 장그래였다. 이윽고 해준이 자신의 위에 올라탔을 때 백기는 한껏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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