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제목 없음 # 未生 2015. 7. 28. 15:40

해준백기




건물을 나서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눈앞에 뿌려지는 물줄기에 백기는 계단 위로 슬슬 뒷걸음을 쳤다. 갑작스러운 비였다. 출근길에 보았던 구름 낀 하늘을 떠올렸다가,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으며 들었던 예보를 기억해냈다. 이제 와 소식에 귀 기울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건 무의미했다. 서랍에 여분의 우산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발길을 돌려 사무실에 가자니 마음이 쉽게 내키지 않는다. 가야 할 수 키로의 빗길보다 돌아가는 몇 걸음이 배로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건너편 정류장에는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백기는 몸을 틀었다 돌리며 갈등했다. 마음과는 다르게도 길 잃은 구둣발 소리는 경쾌하다. 쏴- 지면을 가르는 빗소리가 발소리를 삼켰을 때 결심한 앞코가 가지런해진다. 언제까지고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던 것이다. 백기는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가방을 한 번 털어내고 머리에 썼다. 그때 그의 위로 동그란 그림자가 얹어졌다.  




**




개어둔 옷을 만지작거리며 물소리가 나는 욕실 문과 제 손을 번갈아 본다. 초점이 없는 눈빛에는 초조함마저 서려 있는 듯했다. 물소리가 멎자, 마른 천을 문지르던 손끝이 함께 멈추었다. 백기의 가슴은 쿵쿵대고 있었다. 긴장 혹은 기대. 마치 학창시절 아침 조회시간에 구령대에서 제 이름이 호명되기 전처럼. 그 일은 일어나길 바라며 동시에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백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옷가지를 두고 거실을 나섰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수건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닦으며 나온 해준은 백기가 보이지 않자 머리를 털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식탁에 앉아있던 백기가 해준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다 씻으셨어요?”

“응. 고마워. 많이 젖진 않았는데.”



부득불 혼자 가겠다는 백기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보다 더한 해준의 고집 덕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역을 빠져나오자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달음박질치면 금방이라 해도, 해준은 애초에 빗속을 맨몸으로 보낼 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쓰기엔 우산이 작아 백기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해준은 몸의 절반을 홀딱 젖은 채였다. 그리고 백기는 그런 그를 차마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들어가. 그리고 앞으로 우산이 없으면 전화를 해. 비 맞고 다니지 말고.’

‘저기, 대리님.’

‘응.’

‘….’





젖은 옷을 접어 비닐백에 넣는 해준을 물끄러미 보다, 백기는 뒤늦게 찬장을 뒤졌다. 



“라면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면 배달음식이라도…….”

“시킬 필요까진 없고. 라면 먹어도 돼.”



거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밖의 대답이었다. 일 여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은 분식점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어 막연히 좋아하지 않는구나 멋대로 생각했던 거였다. 백기는 언제 마지막으로 꺼냈는지 모르는 커다란 냄비에 물을 받고 그것을 불 위에 올렸다. 어느새 해준이 등 뒤로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백기는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 순서는 굳이 떠올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지막한 음성에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한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곧이어 건조한 입술이 와 닿는다. 백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번쩍. 어떤 장면이 떠오른 순간, 그를 밀어냈다. 해준이 곧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물.. 끓어서. 이내 시선을 피한다. 붙잡힌 팔을 떼는 백기에 해준은 가스레인지를 돌려 껐다. 



“백기야.”



..대리님.


.....대리님.




**




팀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소주 두 잔이 마지노선인 그에게 건네지는 잔은 독과도 같았다. 더 마시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주는 술을 거절할 배짱은 없었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러눕고 나니 부끄러움 보다 앞서는 건 뭐 어떠냐는 식의 자포자기였다. 선잠이 들려던 찰나였다. 허공에 몸이 들린 것도 그때였다. 늘어진 자신의 팔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에 걸쳐지고 다리는 멋대로 움직여져 몇 미터를 걸었다. 해준은 백기를 근처 카페에 데리고 가 음료와 얼음물을 앞에 놓아주었다.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 비몽사몽 하던 백기는 밝은 조명과 음악에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했다. 해준은 맞은편에 앉은 백기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기가 이따금 깨어나 몸을 움찔대면 흘끔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해준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가의 수염은 어느새 듬성듬성하게 올라와 있었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그 또한 회식에 참여했고 다음 날 오전 회의가 있어 집에 가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차였다. 길가에 널브러진 후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료와 물을 마시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온 백기는 제 앞의 남자가 익숙한 인물임을 깨닫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사수이며, 바닥에 누워있던 저를 둘러업고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까지. 손 하나 까딱하는 데에도 숨을 몰아쉬는 그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웅얼대는 백기에 해준은 피식 웃기만 한다. ..왜 웃으십니까. 



“내가 머저리 같아서요.”



에? 백기는 되묻는 것처럼 그에게 반문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효과가 있는 모양이네요. 정신 드는 것 같으면 나가서 걷죠.”



이번엔 용케도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묻지 않았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 해준을 뒤따라 나가기 전에, 백기는 재빨리 컵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커피인 줄 알았던 컵에는 숙취해소제가 들어있었다.




**




딱. 딱. 볼펜 끝이 일정한 소리를 냈다. 벌어진 곳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뺀다. 딱. 플라스틱 끝이 끝내 부러진다. 백기는 부러진 볼펜 끝을 바라보다 떨어져 없어진 부분을 슬몃 문질렀다. 걸리적거린다고 부러뜨린 게 방금이었으면서, 그새 허전하다. 



“대리님. 말씀하신 자료 여기, 메일로도 보내놨습니다.”

“아,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백기는 볼펜을 내려놓고 서류를 받아들었다. 손끝에 닿은 종이가 따뜻했다. 



“장 대리, 오늘 시간 되나?”  



백 과장이 사무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한잔 하자고.” 백기는 요일을 셈하다, 문득 떠오르는 날에 달력을 꺼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달력이 특정 날짜에 펼쳐져 있었다. 백기는 텅 빈 달력을 바라보다가 한 장을 북 뜯어낸다.






“대리님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세요?”



로비에서 만난 사람은 과거에 한 층을 쓰던 이였다. 나누는 게 비단 인사뿐이었을 지라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얼굴이다. 



“뭐. 그냥. 그렇게 지내죠.”

“15층 가세요?”

“아.”



백기는 버튼을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다른 층을 눌러놓았던 것이다. 정정하듯 몇 번 더 눌러보지만 켜진 불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도달하기 전 다른 층을 눌러댔다. 그리고 도망치듯 내렸다. 내린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백기는 홀린 듯 화장실을 찾았다.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머리가 깨일 때까지. 쏴아- 손안으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거셌다.


헉. 백기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어느새 흠뻑 젖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낡은 대문에는 집주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이의 명패가 걸려있었다. 이 집의 2층이 바로 자신이 세 들어 사는 곳이었다. 백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센 비 때문인지 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백기는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자신이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되짚었다. 퇴근하던 중 비가 쏟아져,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류장까지 뛰었다…. 사람들 사이로 파묻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고 내렸을 때는 비가 꽤 많이 오는 중이었다…….

몸은 속옷까지 푹 젖어 옷을 벗어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알몸이 된 백기는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켰다. 몸을 말리는 동안 턱 아래가 덜덜 떨렸다.




**




부엌에 들어가자, 마른 냄비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백기는 가스레인지를 돌려 껐다. 




**




두 사람은 걷고 있었다.


사무실 근처에는 값비싼 남성복을 파는 매장들이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마네킹은 백기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퇴근길에 백기는 종종 그곳에 들르곤 했다. 하지만 제 옷을 사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색색의 파스텔 톤 셔츠를 보며 해준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입은 해준의 모습, 그것을 받았을 때 해준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사는 자신의 모습. 



“갖고 싶어?”



전시된 내부를 습관처럼 쳐다보고 있었는지 옆에서 해준이 묻는다. 아,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뒤늦게 손사래를 쳐보지만 해준은 백기의 팔을 잡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물쩍거리며 매장을 돌아다니던 백기는 애꿎은 넥타이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만 했다.

 


“이건 어때?”



해준이 가리킨 건 네모난 브리프케이스였다. 백기는 각 잡힌 새 가방을 바라보았다. “네 것, 쓴지 벌써 몇 년 됐잖아.” 그리고 자신의 가방을 본다.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모서리 네 끝이 낡아 있었다.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기는 끝내 바꿀 수 없었다. 그가 가방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해준이 새 가방을 백기의 손에 쥐여준다. 새 가방은 훨씬 가볍고 들기에 편했다. “잘 어울리네.” 해준은 멀찌감치 서서 그를 칭찬했다. 백기는 부드러운 가죽 손잡이를 꽉 쥐었다. 




**




여름의 밤은…어지럽다. 그는 항상 취해있었다. 백기는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쓰며 길을 걸었다. 규칙적이지 못한 구둣발 소리가 조용한 거리를 울려댔다. ‘아이, 씨.’ 기어코 그와 어깨를 부딪친 행인이 백기에게 욕설을 하고 지나간다. 위태롭게 비틀대던 몸이 결국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흐, 으흐..”



백기는 미친 사람처럼 넘어진 채로 웃어댔다. 웃음은 곧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흑, 어흐.. 어흑.”



차도는 유독 밝았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인도와는 달리, 헤드라이트를 단 차들은 팔 차선 도로를 쉴 새 없이 갈랐다. 백기는 달빛을 좇는 나방처럼 엉금엉금 차도 가까이로 기었다. 빛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빵- 경적이 울림과 동시에 팔이 잡혔다. 백기는 다시 어둠 속으로 나뒹군다. 고개를 들자 해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미쳤어?”

“…….”

“다친 데는.”



그를 일으킨 해준이 엉망이 된 무릎과 손을 살피며 물었다. 옷이 망가지는 건 애초에 신경 밖이었다. 백기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해준을 보았다. 그를 보는 눈가는 전처럼 젖어있지 않았다. 계절 내내 장마던 그곳에 드디어 가뭄이 드는지도 몰랐다. 



“..대리님.”



해준은 백기의 무릎과 엉덩이, 팔을 차례로 털어주었다. .....대리님. 해준은 이제 멀리 떨어져 있던 가방을 주워 백기에게 들려주었다. 저를 챙기는 모습이 낡아 있어 백기는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만다. 대리님, 이제 그만 떠나주세요. 백기는 결국 하지 못한 말을 목 뒤로 삼켰다. 해준은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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