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A와 B사이의 사선 # 未生 2015. 7. 29. 22:48

해준백기




장백기는 후배 소개로 만난 사업 파트너였다. 소개해 준 이의 말에 따르면 동문에 나이 차도 많이 나지 않고, 잇속과 셈에 밝아 함께 일하기 나쁘지 않을 거라 했다. 내가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비슷한 사람. 동류일 필요까진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을 찾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사람이길 원했다 그 또한 욕심이었을지언정. 그가 오기로 한 날 나는 화분에 물을 주고 방향제를 뿌렸다. 그리고 사무실로 유유히 걸어들어오는 그를 보며 직감했다. 욕심이었구나.


장백기는 흠 잡을 데 없는 스펙을 가졌지만 기획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이것은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는 그 자신만만함을 갖기 전에 먼저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충돌한 지점은 늘 그곳이었다.



“안 돼.”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아이디어는 좋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이걸로 투자받아올 수 있겠어?”

“제가 뭐든 찾고, 만들어올게요. 선배들 불러서 프레,”

“어떻게. 어느 세월에.” 

“…….”

“내가 준 책 한 번이라도 펼쳐봤으면 이거 하자고 얘기 못 꺼냈을 텐데.”

“…….”

“서버 문제없나 로그인해서 체크 좀 해줘요.”



아, 관리자 모드로 접속해야 하는 건 알지? 장백기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방 밖을 나갔다. 나는 말 한마디 없이 사무실을 나간 그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한 동안 들어오지 않는다 싶어 나가보면 오피스텔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똑똑 나는 유리창을 두들겼다. 세상 무너진 표정을 하고 연기를 뿜어내던 그가 나를 본다. 금연 스티커를 가리키니 오만상을 쓰고서 꽁초를 밟았다. 들어오려던 그에게 나는 얼굴을 내밀고 한마딜 더 했다.



“꽁초 쓰레기통에 버리고 와. 쌓이면 냄새나.”



장백기는 진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 안 할래. 다 때려치울 거야. 내 짐 빼줘요. 내일부터 안 나올 거니까.”

“장백기. 니가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낮과 같은 벌건 얼굴을 하고 맥주잔을 꼭 쥔 장백기가 말했다. 때려치운다는 게 이번으로… 열다섯 번째쯤. 다섯 손가락을 넘기고선 세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에 한 두회 정도 더 있을 수 있겠다. 첫 번째 시도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한다. 장백기는 출근하자마자 기세 좋게 사직서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놀란 나는 당장 그날 저녁 그와의 술약속을 만들었고 사직서는 설득 끝에 그 자리에서 조각났다. 그 후로 생긴 변화는 매일 저녁 가지게 된 술자리뿐.



“너 생 신입이야. 이렇게 단둘이 있는 데 아니고 몇백 명이 있는 델 가도 종일 숫자나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시절이라고.”

“그럼 선배는, 어? 나보다 몇 년이나 더 살았다고. 끄윽. 알면 얼마나 더 안다고요.”



이 또한 반복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장백기는 꼬인 발음으로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되풀이해 말했고 정정하려 말이라도 끊으려 하면 되려 버럭 언성을 높였다. 물론 거기에 침묵으로 응수하진 않았다.-그게 문제였다- 서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서버들이 테이블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걱정스레 우리를 본다. 혹여 싸움으로 번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결코 오지 않는다. 나는 멀쩡한 얼굴로 긴장한 얼굴의 직원에게 얼음물 한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대놓고 말하자면 장백기는 내 타입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셔도 마음 한 톨 안 생기는.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비웃었다. 마음 하나 없이 어떻게 키스가 가능하냐고. 분명 무의식중에 마음을 키웠을 거라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첫 의도는 명확했다. 저 조잘대는 입을 다물게 하는 것뿐이었다. 맹세코 그뿐이었다. 폭력을 쓰지 않고 입을 막는 방법은 하나뿐이라 생각했기에.



“담배도 못 피우게 하는 회사가 어딨냐구요. 다 자기 맘대루야! 독재자!” 

“넌 진짜..”

“읍!”



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단번에 성공했다. 장백기는 끕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훌륭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다. 말 그대로 박치기에 가까웠던 돌발행동에 내가 더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반면 장백기는 뭐가 그리 기쁜지 연신 얼굴을 붉히며 웃어댔고. 



“뭐가 웃겨?”

“그냥요. 그냥. 이게 다 이해가 돼서요.”



그게 장백기에게 연정을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빈집에선 쪽쪽 입을 맞추는 소리만 울렸다. 잘 벗겨지지 않는 신발을 구겨 벗고 겨우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장백기가 쓰러지지 않도록 팔로 단단히 잡아 그의 신발을 벗겼다. 주차장에서 올라오기까지 족히 한 시간이 걸렸다. 이젠 침실까지가 천릿길이다. 교제한 지 한 달째.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하룻밤을 묵던 장백기는 내 집으로 집을 옮겼다. 함께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라 여긴 우리는 비로소 스물 네 시간을 함께하게 된 것이다!


눈부신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뒤 장백기는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나의 칭찬으로 그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흥분해있었다. 차 안은 온통 그와 내가 뿜어내는 호르몬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날은 폭죽을 터뜨리고 축배를 드는 것보다 서로를 오롯이 탐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곧 짐을 바닥 아무 곳에나 던져버리곤 그 위로 옷가지까지 벗어 던졌다.


장백기가 나를 침대로 넘어뜨리더니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운전하는 내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어 안달 냈다는 걸 안다. 뜨끈한 혀가 내 것을 감쌌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잡아 쥐었다.



“하.. 장백기. 백기야.”



몰려오는 사정감에 나는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만해도 된다는 뜻으로 그의 턱을 잡았다. 고개를 든 장백기의 얼굴은 취한 듯 몽롱해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입술은 퍽 야했다. 나는 그를 넘어뜨리고 서랍을 뒤졌다. 



“비었잖아.”



가볍다 못해 종잇장 같은 상자를 손바닥에 털었다. 상자 안엔 내용물이 한 개도 없었다. 



“없어요? 하나도?”

“왜 빈 곽을 안 버리고 그대로 둬?”

“내가 거기 확인할 일이 뭐가 있어요? 꺼내는 건 항상 형이잖아요. 비었으면 형이 알아서 버렸어야죠.”



없는 걸 알았으면 미리 사다 놓았을 거다. 허망하게 그의 말을 듣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해 반박하지 못했다. 들고 있던 빈 상자를 휴지통에 버렸다. 장백기는 이불 끝을 잡고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다가 내가 돌아오는 것 같자 이불을 홱 몸 위로 덮는다.



“없으면 안 해요.”



알아, 그래서 다녀오겠다잖아. 내 옷 제 옷 할 것 없이 바닥에 엉킨 옷을 뒤져 하나씩 챙겨입었다. 내가 별 말없이 부스럭대고만 있으니 아래로 눈만 굴리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어디 가요?”

“사올 테니까 기다려.”

“사오지 마요. 나 잘 거예요.”

“자지 말고 있어.”

“..싫어요. 잘 거예요. 자는 사람이랑 하는 취향 있으면 사오든가.”



애랑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못 당하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 나갈 때까지 장백기는 몸에 이불을 돌돌 말고 시체처럼 일 자로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었다. 나야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없는데, 내가 그만두면 종일 입 내밀고 있을 게 누구일지. 흘끔 문 쪽을 보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현관을 닫았다.



편의점마다 평소 쓰던 것이 없어, 번화가 근처까지 나갔다. 어, 춥다. 금세 쌀쌀해진 날씨에 나는 몸을 웅크렸다. 어느새 해가 져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불이 켜진 베이커리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꽤나 기념비적인 날인 셈이다. 백기의 프레젠테이션이 투자 유치에 큰 공헌을 했다. 사인을 하고 나오는 길, 그토록 좋아하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축하해주는 게 좋겠지. 나는 베이커리에서 케이크과 샴페인을 사서 나왔다. 




**




[데리러 와요. XX]



보던 영화가 지루해 잠들기 직전이었다. 장소만 쓰여있는 문자를 보며 하품을 크게 했다.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자동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평소라면 알아서 오라고 했을 터였지만, 생일이라고 나간 자리라 특별히 늦은 귀가에 눈감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보낸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멀리서도 놀았네. 데리러 가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진대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동창들이랑 마신다고 했으니 아는 이를 만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토록이나 밤이 밝은 나라라니. 이 시간이면 잠들어있는 평소를 생각해보면 아깝기까지 하다. 나는 상호와 층수를 확인하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하나씩 올랐다.



“강해준?”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목소리에 걸음을 뚝 하고 멈추었다.



“강해준, 맞지?”



나는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임혁규.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 그리고….  






“늦게 안 다닐게요.”

“…….”

“오늘은 어쩔 수 없었잖아. 선배들 오는 자린데 먼저 가겠다고 일어날 수도 없고. 그래서 형 부른 거잖아요.”

“…….”

“저기, 형. 화 많이...”

“그런 거 아니야.”



장백기는 말없이 운전만 하는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덧붙인다.



“화난 거 아니야.”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쓸었다. 백기가 마당발이라는 건 전부터 알았지만 혁규와도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기는 화가 나지 않았다는 내 말에 안심한 듯 시트에 몸을 묻었다. “무슨 모임이었어?” 넌지시 물으니 동아리란다. 연극 동아리. 문득 연극 동아리와 임혁규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었나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아 나는 허탈히 웃었다. 그러면서도 참 그답다고 생각했다. 장백기는 갑자기 웃는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장백기는 오전 내 내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못 본 척 책상에 눈을 고정하니 코앞까지 다가왔다. 헛기침을 하며 창 너머를 보다가, 휴지통을 비우는 척하더니 한 번 와르르 쏟고, 이제는 안 하던 마포 질까지 하고 있다. 



“할 말 있어?”



나는 펜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제야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

“사적인 거야?”

“혁규 선배랑 사귀었었어요?”



고작해야 허락을 구하려는 말로 추측했다. 예상외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어디서 듣고 온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는….”

“선배한테 애인 있다고 얘기해요.”

“지금?”

“네.”

“장백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왜 못해요? 나랑 사귀는 거 밝혀달라는 것도 아니구. 그냥.. 애인 있다고 얘기해달라는 거잖아요.” 

“…….”



장백기는 내 휴대폰을 내민 채 꿋꿋하게 서 있었다. 꾹 다문 입이 행동만큼이나 단호했다. 하지만 눈은 달랐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이 흔들리는 눈은 나에게…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알았어.”



내 대답에 장백기는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상단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을 더듬어 오래간 손대지 않았던 두통약을 꺼냈다. 하아.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나는 끝내 혁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

이름만 가져왔을 뿐이지만 

혁규(영화 마도ㄴ나)는 매우 많이 좋아하는 캐릭터라 넣어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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